매일신문

[사설] 최영수 대주교를 떠나보내며

천주교 대구대교구 제9대 교구장 최영수 요한 대주교가 지난달 31일 67세를 일기로 선종(善終)했다. 최 대주교는 5일간의 애도 기간을 거쳐 4일 장례미사를 끝으로 세속을 떠나 영면에 든다. 빈소가 차려진 계산성당에는 수많은 신자, 각계 인사, 일반시민들의 애도 물결이 이어졌다.

최 대주교는 1970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40년 동안 목자(牧者)로서, 사회운동가로서, 지역은 물론 나라의 큰 어른으로서 주어진 본분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주임신부 시절 성당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연탄가스에 중독되고, 라면을 밥처럼 먹었다는 일화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70년대 초 성당에 신앙학교를 처음 도입해 청소년 교육에 앞장선 것도 그였다. 2007년 교구장에 착좌(着座)하면서는 2011년 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성전 건립, 100주년사 편찬 등에 매진했다.

그의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많은 이들은 그를 '흰머리 소년'이라고 부른다. 사제라는 막중한 틀 속에서도 늘 부드러운 웃음과 소년 같은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 사회운동가로서는 강단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2001년 한국 종교계의 6대 종단과 연합해 사형 폐지 운동을 벌이고 반생명법인 모자보건법 폐지 운동에도 앞장섰다. 새만금 갯벌 살리기 때는 주교회의에서 처음으로 성명서를 발표하며 환경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매일신문 사주로서 지역 발전을 위한 언론관도 남달랐다. 최 대주교는 힘든 투병 기간과 선종 순간까지 지역의 평화와 화합을 걱정하는, 큰 어른으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최 대주교의 삶의 바탕은 생명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넓고 큰 사랑을 알기에 많은 신자들과 시민들은 애통해 하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 사회 원로가 필요한 이때, 큰 목자이자 지역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최 대주교의 선종은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다. 영원한 안식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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