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선비,왕을 꾸짖다(신두환 지음/달과 소 펴냄)

죽음을 무릅쓴 상소 '왕조정치의 꽃'

상소(上疏)는 정사를 간하기 위해 임금에게 올렸던 글로 정치문화의 꽃이었다. 선비들은 벼슬을 버리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직간했다.

왕에게 진언하는 말인 만큼 한 글자 한 글자 신경을 썼고, 고도의 기교로 할 말은 하되 예절을 지켰고, 자신의 견해를 낱낱이 밝히되 군더더기가 없었다. 시골의 선비라 할지라도 나라 안팎의 정세는 물론, 현실적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썼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소는 신라시대 김후직이 진평왕에게 올린 글이었다. 중국 진(秦)나라 이전에는 상서(上書)라고 했고, 진나라 때는 주(奏)라 했고, 한나라에서는 장, 주, 표, 의 등으로 세분화했다.

선비들과 벼슬아치들만이 상소를 올린 것은 아니다.

평양 용천 기생으로 양반의 첩이 된 초월은 15세이던 때(헌종 12년) 상소를 올려 자신에게 내려진 '숙부인'이라는 직첩을 거두어 달라고 고했다. 비록 벼슬아치 심희순의 첩이 되었지만 본디 천한 창녀의 신분으로 숙부인이라는 직책은 과하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말문을 연 초월은 자기 남편이 죽어 마땅한 인물인 만큼, 남편을 삭탈관직해달라고 호소했다.

'지아비의 죄는 천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고,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으며, 천만 번 칼로 찌르고, 만 번을 귀양 보내도 오히려 못 다할 듯 하온데 이 어찌하오리까. 전하께서 부처님 같은 은혜로 지아비의 죄를 용서하신다 하더라도 삭탈관직하여 전리농토(田里農土)로 내쳐 십년을 두문불출하게 하여 부지런히 성현의 글을 읽고 스스로 몸을 닦게 하는 것이 평생 소원이옵니다.'

그녀는 남편의 죄목을 구구절절 읊고 있다. 결론은 '내 남편은 나쁜 놈이니 처벌해 주십시오' 였다. 남편 이야기뿐만 아니다. 이 상소문에는 헌종 시대인 조선 말기의 사회 붕괴 조짐, 세도정치의 폐해, 관리들의 부정부패, 민생의 어려움 등을 세세하게 담고 있다. 실록에 실린 글이 아니라, 1979년 편찬된 평안북도 도지에 적힌 내용이다. (상소가 아니라 누군가 쓴 소설 같다는 느낌도 든다.)

초월의 상소는 진솔한 표현과 과감한 언어가 돋보인다. 그러나 대체로 상소문은 예와 격을 알뜰하게 갖춘 글이었다. 예의를 갖추지 않아 말썽이 됐던 대표적인 글은 남명 조식이 명종 10년(1555년)에 쓴 '을묘사직소'였다. 임금이 현감 벼슬을 제수하자 조식은 이를 거절하면서 몇 가지 이유를 댔다. 그 중 일부가 문제가 됐다.

'자전(慈殿-임금의 어머니를 높이 칭하는 말)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외로운 아드님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민심(民心)을 어떻게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중략) 이러한 때에 (신이) 비록 재주가 있다 하고 벼슬이 정승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손을 쓰겠습니까.'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에게 올린 상소였다. 상소에서 조식은 명종의 어머니로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를 '한낱 궁중의 과부'라고 일컬었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상소였지만 권력가들도 어쩔 수 없었다. 선비의 상소를 문제 삼을 경우 '언로 탄압' 등 더 많은 문제에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소로 조식은 조선 선비 사회의 스타가 됐다. 그러나 퇴계 이황은 이에 대해 '남명의 소장은 요새 세상에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나, 말은 정도를 지나 임금이 보시고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고 했다.

선비들은 상소를 올리면서 한껏 임금을 치켜세웠다. 좋은 말을 두루두루 한 다음, '다 좋은데 이것 하나가 흠이다, 많은 공부를 하시고 세상만사를 다 아시는, 훌륭한 상감마마께서 이것 하나를 잘못 보셨으니 아쉽다'는 투였다.

상소란 정직하고 강직한 선비가 오직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올렸을까. (사람마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방법이 다를 수는 있다.) 일진회장 이용구의 상소는 당시 잘못된 지식인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고 살려야 살 수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을 병 앓는 사람에 비유하면 명맥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됐습니다.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시체를 한갓 산 것으로 보았을 뿐입니다. 외교가 어디 있습니까. 재정이 어디 있습니까. 폐하의 뜻을 가지고 아래 신하들과 도모하는 것이 없습니다. 군기(軍機)가 어디 있습니까. 법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땅에 한 부대의 육군도, 바다에 한 함대의 해군도 없으니 어찌 나라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일본과 한국이 나라를 합쳐서 하나의 큰 제국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논이야말로 2천만 동포로 하여금 죽을 곳에서 살아날 구멍을 새로 얻게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용구의 이 상소문은 친일내각에 힘을 실어 결국 한일병합을 이루게 하는 데 기여했다.

상소문을 올리면 그것으로 끝이었을까? 임금의 답이 없을 때 선비들은 어떻게 했을까.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이름을 떨친 조헌은 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1591년) 옥천에서 한양으로 올라와 선조 임금에게 '지부상소'를 올렸다. 일본의 외교 문서가 패악스러우니 사신의 목을 자르고 왜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은 답하지 않았다. 이에 조헌은 다시 상소를 올리며 '신의 상소 1통을 보관하고 계시다가 일이 닥쳤을 때 살펴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그는 또 자신은 가난하며 서울에 온 지 여러 날 돼 주머니가 비어 굶주리고 있다고 했다. (답을 빨리 주시면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한 것이다.) 이번에도 왕은 답하지 않았다.

조헌은 답이 없자 돌에 이마를 찧어 얼굴에 피가 가득했다. 이를 본 사람들의 안색이 위축됐다. 간원이 '상소가 임금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언로가 막힌다. 색승지를 파직시키소서'라고 고했다. 이에 왕은 상소를 받았다는 뜻을 전하며 '뒤에 생각해보겠다'는 답을 내렸다. 왕의 비답에 조헌은 통곡하면서 물러갔다.

이 책은 역사상 유명하고 중요한 상소를 골라 해설과 함께 엮었다. 상소문의 격, 상소를 올린 사람의 인품, 상소를 올릴 당시 나라 안팎의 정세 등도 두루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최만리의 한글 창제 반대상소는 지금 보기에는 어처구니없으나 당시 선비들에게 '한글'이 얼마나 흉측하고 기막힌 일이었는가를 보여준다.

'전하,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 이른바 신기롭고 향기로운 양약 소합향을 버리고 쇠똥을 굴려 만든 말똥구리의 당랑환(螳螂丸)을 취함이니 어찌 문명의 결함이 아니오리까.'

476쪽, 1만9천5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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