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자 안했으면 좋은 책 번역했겠죠"…손지애 CNN 한국지국장

"외신에 비친 한국의 모습들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대구지하철참사가 터지고, 국보1호인 남대문이 불탄 소식을 톱기사로 전할 때는 외국에서 한국을 어떻게 볼까 걱정이 되죠. 하지만 제가 해야할 일은 그 걱정보다 더 급합니다. 바르고 정확한 사실보도로 전 세계에 한국에서 일어난 주요사건을 알려야하는 것이니까요. 어떤 표현이 더 쉽게 전 세계인들에게 전달될지 고민하게 되는거죠."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케이블 뉴스채널 CNN의 손지애(46) 한국지국장이 지난 15년간 한국소식을 세계에 전하면서 갖게 된 생각이다. 한국에서 터진 나쁜 소식에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자신의 일에 대한 전문성과 열정이 더 앞서기 때문이다. 손 지국장은 1995년 CNN 입사 합격소식을 듣고 정식발령 대기 이틀 전에 삼풍백화점 사고가 나 바로 현장에 투입되면서 이후 수많은 한국의 사건·사고를 리포팅해 전 세계에 타전했다.

그는 "외신의 눈으로 봤을 때 한국은 뉴스거리의 덩어리"라며 "특히 50년 넘게 이어진 남북 대치 상황은 군사적 긴장감이 흐르고 있어 외신의 주요 관심사"라고 말했다. 특히 핵무기를 둘러싼 북한의 움직임은 전 세계적인 이슈이며 실제 한국의 사건·사고보다 더 뉴스 밸류(Value·가치)가 높다. 실제 CNN 한국지사의 뉴스보도 1순위도 늘 북한 관련 뉴스.

"북한은 베일에 싸여있는 나라라서 외신에서 더 궁금해 하는 게 사실이에요."

20일 서울지하철 광화문역 인근에 위치한 CNN 한국지사에서 손 지국장을 만나 전 세계 212개국, 1억5천만명 이상이 시청하는 CNN과 한국 소식을 전하는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영어는 나의 생명줄

손 지국장은 'CNN 한국지국장이 되지 않았으면 뭘 했겠느냐'는 질문에 "아마도 우리말로 쓴 좋은 책들을 영어로 번역해 외국에 전하는 책 번역가가 되어있지 않았을까요"라고 답했다. 이어 "좀 더 꿈을 확장한다면 제가 번역한 책들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각 분야에서의 노벨상 등을 타는데도 기여하는 그런 전문 번역가요"라고 덧붙였다.

그랬다. 그는 뭘 해도 영어와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었을 것 같았다. 초등학교 4년을 미국에서 보낸 덕분에 중·고교 시절에는 영어만이 자신의 최대 강점이자 무기가 됐다. 고교 시절에는 영어웅변대회에 나가 2등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국제질서와 환경파괴'라는 무거운 주제로 잘 연설해 1등을 기대했지만 같은 학교 친구의 '줄서기'라는 가벼운 주제에 밀려 1등(대통령상)을 내줬다. 그는 지금도 "왜 내가 2등인지 모르겠다"며 아쉬워했다.

'영어, 영어, 영어'는 학창시절 그를 항상 붙어다녔다. 이화여고에 입학하면서 'Ewha Mirror', 이화여대에서는 'Ewha Voice'에서 영자신문 기자로 활약했다. 이도 부족해 원서 토론반, 영어회화 클럽, 영문 잡지 통·번역, 영어 독서클럽 등 닥치는대로 영어관련 활동을 해 가속도가 붙은 영어실력을 더욱 탄탄하게 했다.

첫 직장인 경제전문 영자지 'Business Korea'에서의 활동은 그가 외신쪽에서 지존급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됐다. 사내 커플이었던 남편은 손 지국장보다 3개월 늦게 입사했지만 빠른 타자실력과 유학파다운 영어기사 쓰기로 승진이 더 빨랐다. 그는 처음엔 이를 인정할 수 없었지만 이후 평생의 동반자가 되고나니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선 만난 동료들 역시 모두 실력파로 현재 주요 외신에서 간부자리에 올라있다.

남편인 이병종 뉴스위크 국장과는 동종업계에 있다보니 '척하면 탁'이다. 서로의 생활과 행동반경이 '부처님 손바닥 안'일 정도로 훤히 들여다 보인다. 사실 남모르는 고민도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 풀어놓기 수월하고 진심어린 지적이나 충고도 할 수 있어 부부 시너지효과도 크다. 남편인 이 국장은 "우리 집사람 뭐 취재할 게 있나요"라며 웃으면서 말을 건네기도 했다.

◆CNN 테드 터너 회장처럼 '엉뚱한 상상'

손 지국장은 CNN 설립자인 테드 터너 회장을 딱 2번 봤다. 입사 후 미국에서 한 번 만나고 5년 전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다. 테드 터너 회장은 한반도의 DMZ(비무장지대)를 보존하는데 관심이 많다고 한다. 손 지국장이 그로부터 본받고 싶은 것은 엉뚱함 속에 나오는 추진력과 이를 현실로 만드는 힘이다.

CNN사업 구상도 조그마한 불만에서 출발했다. '하루 종일 뉴스만 볼 수 있는 방송이 없나', '세계 어디를 가도 뉴욕양키즈의 경기결과를 알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24시간 뉴스채널 CNN과 CNN인터내셔널을 만드는 모체가 됐다.

손 지국장은 대학 특강이나 외부 강연을 나가면 늘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의 생각이 전 세계 언론의 판도를 바꿔 놓았습니다. 여러분도 뭔가 불편한 것이 있을 때 그냥 흘러보내지 말고 적극적으로 바꿔보세요. 의외의 큰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손 지국장의 첫 인상은 차분하고 따뜻한 사람같다. 하지만 엉뚱함이 생활 속에 숨어있다. 삼풍백화점 사고 때는 퇴근시간이라 차가 막히자 반대편 도로로 역주행을 감행했는데 나중에 보니 다른 언론사들과 앰뷸런스까지 모두 뒤따라 왔다고 한다.

그는 올해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1학기 수업에서 '팽이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할 때 미국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로 변신, 팽이 홍보대사 역할을 자처해 동기들에게 큰 웃음을 준 적도 있다. 조용조용 말하지만 유머감각도 스킨십도 뛰어난 편이다.

손 지국장은 고도의 압축성장을 한 한국에 대한 자부심도 가득하다. "한국의 글로벌 대기업들은 세계의 자랑거리입니다. 삼성이나 현대, LG 등의 기업들은 불과 20~30년 전만해도 외신에서 제대로 취급조차 받지 못했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한국은 생각보다 세계에서 잘 나가는 나라이고 또 앞으로도 잘 해나갈 것으로 자신합니다."

그는 올해서야 연세대에서 석사공부를 하고 있지만 학사 출신으로 현장에서만 발로 뛰었다. 하지만 그의 강의는 인기 만점이다. 이화여대에서는 학사출신인 그에게 '뉴스 리포팅(Reporting), 라이팅(Writing)' 강의를 맡겼고, 그는 현장에서 발로 뛴 생생한 경험을 이론과 잘 버무려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물론 영어로 가르친다. 게다가 그는 일간지 신문지면 통판에 이화여대를 빛낸 선배로 등장하기도 한 스타이기도 하다.

또 그는 언제 변신을 꿈꿀 지 모른다. 이제 4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치닫는 나이. 세 딸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위해 꼭 도전할만한 일이 생긴다면 여지없이 다 던지고 갈 마음의 준비는 돼 있다. 다만 새로운 변신도 영어와 관계없는 도전거리는 아닐 듯 싶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프리랜서 장기훈 zkhaniel@hotmail.com

◇ 네자매 중 첫째로, 세 딸의 엄마로…남편은 뉴스위크 서울특파원

'네 딸(지애·미애·경애·승애) 중 첫째 그리고 세 딸(미나·유나·지나)의 엄마.'

CNN 손지애 한국지국장의 대를 이은 가족 출산성적표다. 시대를 예감한 것일까. 40여년 전 부모는 은근히 아들을 기대했을텐데 지금은 네 딸이 모두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보배가 됐다. 아들 못지않은 든든한 사위 4명도 들어왔다. 네 딸의 가족만 다 모여도 15명이다. 막내딸은 지난달 결혼했다.

손 지국장의 아버지 손명현씨는 미국 브라운대를 졸업한 유학파 공무원. 경제기획원에 특채 공무원으로 들어갔다 미국에 경제참사관으로 5년간 파견 근무를 나갔으며 이후에는 외무부로 자리를 옮겨 각국 경제공사, 대사까지 역임했다.

부친의 경제참사관 파견시절이 네 딸에게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미국 생활에 빨리 적응토록 집안에서도 모두 의사소통을 영어로 했다. 이 때문에 모국어를 잊고 지낸 손 지국장은 한국에 들어와서도 우리말이 익숙하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 덕분에 그는 한국에서의 중·고교시절 영어에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고, 향후 진로 역시 영어와 관련된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배경이 됐다. 오늘날 CNN 한국지국장, 첫 내국인 여성 외신기자클럽 회장(제19, 20대)을 만든 것.

그가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81학번)를 졸업할 무렵 자리잡은 첫 직장인 영어 경제전문잡지 'Business Korea'는 삶의 든든한 토대를 구축해줬다. 남편인 이병종 뉴스위크 국장(서울특파원)도 이 때 만났으며 당시 함께 일한 동료들은 모두 한국에 있는 주요 외신사에서 한 자리씩 꿰차고 있다.

정든 첫 직장을 떠난 후 손 지국장은 뉴욕타임스 특파원으로 2년간 일하다 때마침 CNN 한국특파원 자리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이크를 잡는 방송쪽으로 옮겨 현재까지 15년째 한국소식을 전하며 살아가고 있다.

권성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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