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만리장성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속담이 있다. 남녀 간에 하룻밤의 인연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자주 쓰인다. 남녀 연예인들이 밤늦게까지 데이트를 하는 TV 오락 프로그램 제목도 '만리장성-하룻밤의 연애'였다. 원래 뜻은 그게 아니다. 잠깐 맺은 인연이나 적은 은혜라도 깊이 지니어 잊지 말라는 의미다. 굳이 남녀 간의 문제로 확대 해석한다면 요즘처럼 쓰지 말라는 법도 없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기 힘든, 거대한 건축물이다. 길이는 인공'자연장벽을 합해 8천852㎞에 달한다. 만 리(萬里)가 약 4천㎞이니 실제로는 2만 리가 넘는 장성이다. 동쪽 끝은 황해에 연한 산해관(山海關)이고 서쪽 끝은 돈황의 옥문관(玉門關)이다.

우리 역사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산해관은 예전에는 임유관(臨 關)이라 불렸는데 고구려와 수나라가 맞붙은 곳이다. 598년 강이식 장군이 5만 명을 이끌고 임유관을 선제 공격, 30만 명의 수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1차 고'수전쟁으로 불리는 임유관 대첩이다.

연암(燕巖) 박지원도 1780년 만리장성을 둘러보고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산해관기'를 남겼다. '오호라! 진(秦)나라 몽염이 만리장성을 쌓아 오랑캐를 막으려 했지만 진나라는 그 집안에 오랑캐를 길렀고, 서중산(徐中山'명나라 초기 무장) 또한 산해관을 쌓아서 오랑캐를 막으려 했지만 오삼계라는 명나라 장수가 관문을 열어 청군을 맞기에 틈이 없었다. 천하가 지금처럼 평온할 적에 한갓 장사치나 나그네들의 힐난거리가 될 줄이야! 난들 산해관을 두고 무얼 말하랴!'

연암은 만리의 성곽과 망루, 관문이 웅장하고 강인하더라도 정치가 무너지고 인화(人和)를 못 이룬다면 외적을 막을 수 없다고 봤다. 만리장성에 쏟아부은 엄청난 노력과 비용에 비해 효용성은 늘 논란거리였다. 어쩌면 위정자의 불안과 소심함이 만들어낸, 세계에서 가장 어리석은 건축물일지 모른다.

중국 학계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기존 산해관에서 길림성(吉林省) 퉁화(通化)현까지 늘리려 하고 있다. 고구려의 성까지 만리장성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고대사를 멋대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만리장성이라는 위대한 건축물을 만든 후예치고는 너무 졸렬한 꼼수다.

박병선 논설위원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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