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지역 주민들이 '공공의 적' 야생동물과 전쟁 중이다. 야생동물 개체수가 급격히 늘어난 반면 개발행위로 서식지는 줄어든 결과다. 야생동물들은 수확기를 앞둔 농촌 들녘에 무차별 침입해 농작물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야생동물 포획 허가를 비롯한 농민과 지자체의 온갖 묘책에도 농작물 '사수'는 한계에 부딪혀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공의 적' 야생동물
6일 칠곡 지천면 황학리. 사방에 솟은 산이 마을을 옴폭 안고 있다. 산비탈에 다닥다닥 자리 잡은 농가는 고즈넉해 보인다. 그러나 속내는 딴판이다. 마을 논밭 작물은 쓰러지고 파헤쳐져 있다. 폭격을 맞은 듯하다. 330㎡(100여평) 논이 반쯤 쑥대밭이 된 곳이 보인다. 무르익은 벼는 없고 갯벌처럼 검은 속살을 드러낸 논이 수두룩하다. 주위에는 고라니, 멧돼지 발자국이 선명하다. 갑자기 논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 고라니가 있던 자리의 벼는 모두 목이 잘려 있다.
경북도에 따르면 수확기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야생동물은 멧돼지, 고라니, 청설모, 까치 등이다. 지난해 농작물 피해 금액만 15억여원에 달한다. 김천시가 2억6천900만원으로 가장 피해가 컸고 청송군 2억4천200만원, 경주시 2억1천200만원, 상주시 1억1천만원 순이다.
이 때문에 수확철을 앞둔 농부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6년 전 고향인 황학리로 귀농한 홍성근(55) 이장은 "멧돼지, 고라니 때문에 고구마, 당근 등 뿌리 작물은 수확을 포기해야 할 지경"이라며 땅을 쳤다.
◆농작물을 사수하라
지자체들과 농민들은 야생동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경북도는 지난 8월부터 포항, 경주, 김천 등 도내 15개 시군에 엽사 15명 내외로 구성된 '수확기야생동물피해방지단' 272명을 운영하고 있다. 8월 한 달간 멧돼지 136마리, 고라니 354마리, 까치 712마리 등 모두 1천749마리 유해 동물을 포획했다.
강원도 홍천군은 지난달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과 함께 획기적인 야생동물 퇴치 장치를 개발했다. 열센서, 적외선 감지기로 야생동물을 식별한 뒤 호랑이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폭탄 터지는 소리 등 6가지 소리가 나는 똑똑한(?) 야생동물 퇴치 장치를 선보였다.
농민들도 묘안 짜내기에 고심이다. 밭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호랑이 울음소리를 틀어놓는 건 기본. 심지어 텐트를 치고 뜬눈으로 농작물을 지키기도 한다. 그러나 속절없이 당하기 일쑤. 주민 박성태(65)씨는 "밤새도록 호랑이 울음소리를 틀어놨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며 "오히려 서울에서 캠핑 온 학생들이 마을에 호랑이가 산다고 언론사에 제보해 소동만 빚었다"고 말했다.
◆이젠 정부가 나서야
농민들과 지자체의 노력에도 농작물 피해는 숙지지 않고 있다. 유해 동물 개체수를 줄이는 것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야생동물 포획을 허가하더라도 특정구역 내에서만 야생동물을 잡을 수 있고 밤시간대는 총기 사용을 제한한다.
11년째 엽사로 활동하고 있는 장권재(41)씨는 "멧돼지, 고라니 등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히는 동물은 거의 야행성이어서 밤에만 활동한다"며 "대낮에 이들의 발자국이나 배설물을 따라 포획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야생동물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하는 전기 목책과 그물망은 농민 부담이 크다. 시설비 60%만 국비와 지방비가 지원되기 때문이다. 석길수(65)씨는 "산간지역 농민 대부분이 60∼80대 노인이고 소규모 농사를 짓고 있다"며 "이들이 큰 돈을 내 어떻게 논밭에다 철조망을 두르겠느냐"고 말했다.
제한적인 야생동물 피해보상 범위도 농민을 두번 울리고 있다. 야생동식물보호법은 동식물특별보호구역과 생태·경관보전지역 등 특정 지역에 한해서만 보상 규정을 두고 있다. 일반 농가는 전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지난 6월 일반 농가로까지 피해 보상을 확대하는 동식물보호법 일부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황영철 한나라당 의원은 "야생동물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가 늘고 있지만 지원은 지자체별로 제각각이어서 효과가 미미하다"며 "이제 정부가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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