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9 낙동·백두를 가다] 43) 김천의 젖줄 '감천'

170리 굽이치는 물길 따라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향기…

사모바위·할미바위는 인물의 고장 김천을 대표하는 전설이자 부부의 연을 이어오고 있는 바위다.
사모바위·할미바위는 인물의 고장 김천을 대표하는 전설이자 부부의 연을 이어오고 있는 바위다.
김천의 젖줄이자 낙동강 중류의 제1지류인 감천은 경북과 경남의 경계인 대덕면 봉화산에서 발원해 170리 대장정을 구미 선산 원동에서 끝낸다. 감천은 또한 김천 역사·문화의 향기가 흐르는 강이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김천의 젖줄이자 낙동강 중류의 제1지류인 감천은 경북과 경남의 경계인 대덕면 봉화산에서 발원해 170리 대장정을 구미 선산 원동에서 끝낸다. 감천은 또한 김천 역사·문화의 향기가 흐르는 강이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어느 고장을 가든 젖줄이 있다. 특히 낙동강을 끼고 있는 경북의 고장들은 낙동강에 큰 물을 내주는 지류를 갖고 있다.

김천에는 감천이 있다. 감천은 김천의 남서에서 북동쪽으로 꿰뚫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김천의 제1하천이자 낙동강 중류의 제1지류다.

그 첫 물줄기는 경남과 경북의 경계가 되는 대덕면 봉화산의 속칭 '너드렁 상탕'에서 시작한다. 낙동강 중류의 가장 큰 지류답게 감천의 강폭은 꽤 넓었다. 가뭄 탓에 강의 수량은 줄었지만 여전히 백두대간 준령 곳곳의 첫 물을 품은 뒤 낙동강으로 쉼없이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감천은 김천 신음동에서 김천의 제 2하천인 직지천과 합류, 수량과 하천 폭을 크게 넓힌다. 유연한 그 줄기는 농소, 남면, 개령, 감문면 등지의 소하천 물까지 죄다 끌어안은 뒤 구미 선산의 원동 낙동강에서 170리(69㎞) 대장정을 끝내는 것이다.

감천 역시 여느 고장의 젖줄처럼 문화와 역사의 향기가 꽃피워 내고 있었다.

발원지가 위치한 대덕면은 경북과 전북, 경남 등 3개도의 접경지.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대덕면의 우두령은 임진왜란과 동학, 한국전쟁 등 역사의 고비 때마다 호국의 보루 역할을 한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 고령 출신 의병장 김면 등 의병 2천명이 진주목사 김시민과 합세해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 1천500명을 급습해 큰 전과를 올린 전투의 현장이다. 전투에서는 사냥꾼과 심마니들이 대거 참여해 공을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18세기 초 이인좌의 난 때 그의 아우 이웅보가 우두령을 점령하고자 할 때도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대덕면을 지날 때 눈을 지그시 감고 격정의 우리 역사를 되새겨봄 직하다.

대덕을 지나면 지례면이다. 지례의 궁을산은 직지사 뒤산에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의 태(胎)를 묻은 것처럼 17대 효종의 3녀인 숙경공주와 6녀 숙정공주의 쌍태가 안치된 태봉으로 유명하다. 마을 사람들은 1940년대까지 봉분과 태실비가 있었다고 했으나 지금은 구덩이만 남아 있었다. 구성면에 이르면 상원리라는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연안 이씨 집성촌으로 마을 전체가 조선 8대 명당터다. 감천과 하원천이 마을을 감싸는 형국의 연화부수형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명문가도 탄생했다. 명당에 구전되는 이야기도 '명당급'이다. 마을의 선대 큰 어른이었던 이말정은 유언에서 후손의 묘를 조상의 묘로부터 아래로 쓰지 말고 아래에서 위로 쓰는 역장(逆葬)을 하라고 했다. 훗날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 조선에서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막아볼 요량으로 전국의 명당을 파내 그 관으로 부교(다리)를 만들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전국 명당이 훼손됐으나 이말정의 묘는 역장이라는 유언으로 인해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이 한 달간 머물며 포교했다는 구성면 용호리의 복호마을을 둘러본 뒤 감천면과 조마면으로 향했다.

감천의 중류로 삼한시대 변한 12국의 하나인 주조마국이 있었던 지역이다. 주조마국은 김천을 가장 대표하는 고대국가인 감문국과 함께 김천 땅에 위치한 또 다른 소국이다. 주조마국은 감문국보다 오래 존속했다. 고대국가의 흔적으로는 가야토기가 다수 출토된 것이 유일하다. 하지만 서기 231년 감문국이 멸망한 뒤 가야연맹의 보호와 감천의 지형적인 방어선 덕에 감문국 멸망 330년 뒤인 562년 신라 장군 이사부의 성산가야 공격 때 비로소 멸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조마국은 감문국과 함께 김천의 뿌리인 셈이다.

감천을 따라 다시 내려오면 개령면 일대에 다다른다. 감천의 하류지역이다. 태촌 3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이 '배시내'다. 옛날 소금과 생선 등을 실은 나룻배가 낙동강을 따라 감천까지 거슬러 올라와 아포와 감문, 개령으로 물품이 갈라지는 요지다. 큰 장이 섰고, 그래서 마을 이름이 '배가 드나드는 시내'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명 유래의 전형이 아닐까 한다. 인근의 광천 2리 횡천마을도 그러하다. '감천이 개령으로부터 빗겨 흐른다'고 해서 '빗내' 즉 '횡천'(橫川)으로 이름했다. 마을은 또 김천을 대표하는 빗내농악의 '발원지'였다. 빗내농악전수관이 자리하고 있다. 빗내농악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8호로 지정돼 있다. 고대국가인 감문국시대 농사의 풍흉을 좌우하던 감천을 받드는 제례의식이다. 또한 감문국이 이웃나라와의 오랜 전쟁을 통한 군사 훈련과정이 풍물놀이로 발전한 우리나라의 유일한 진(陣)굿이다.

개령 동부리의 아도화상이 직지사와 함께 창건한 계림사는 호랑이 풍수설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계림사가 자리한 호두(虎頭)산은 호랑이가 고개를 들고 있는 형국. 호두산의 살기가 강해 감천 너머 맞은편 아포의 함골에서 연이어 사람이 죽어나갔다. 선산 도리사에서 직자사를 짓기 위해 수시로 선산과 김천을 오가던 아도화상이 호두산의 살기를 누르기 위해 절 이름을 호랑이와 상극인 닭이 숲을 이루어 산다는 뜻의 '계림'으로 하고, 맞은편 함골 뒤산을 개를 달아놓았다는 뜻의 구현산으로 했더니 살상이 그쳤다는 것이다.

사모바위·할미바위 전설도 감천따라 꽃피는 전설이다. 모암산 서쪽 끝 사모형상 바위의 정기로 인해 김천에 고관이 많이 배출됐다. 그러나 수시로 고향을 찾는 고관들의 수발에 힘이 든 김천역의 역리가 바위를 깨뜨렸고, 이후 과거 급제가 끊겼다. 이에 양천동 하로마을에서 바위를 마을 입구로 옮겨 모신뒤 옛 영화를 기원하자 다시 인재가 났다는 전설이다. 또 풍수지리로 볼 때 김천의 형세는 혼인형이다. 사모바위와 할미바위는 신랑·신부로 감천 너머 황산을 병품삼아 식을 올리는데 축하객이 넘쳐났고, 식장 인근의 시장이 번성하는 등 김천에 큰 영화가 이어졌다는 전설이다. 김천은 최근 사모바위와 할미바위의 결혼식을 올려주기도 했다.

글 이종규기자 김천·김성우기자 사진 정운철

자문단 송용배 김천 부시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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