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들판. 가을을 말할 때 누구나 떠올리는 비유다. 자주 사용하여 참신성이 떨어지지만, 가을을 가장 잘 표상하는 말인 것 같다. 왜 황금들판인가? 가을 들판에 벼가 익는 모습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랗게 익은 벼가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다. 봄꽃의 노란 색이 공중을 폴폴 나는 나비처럼 경쾌한 느낌을 준다면, 황금빛 들판은 풍성한 포만감으로 가슴이 벅차도록 해준다. 그런데 '황금들판'에서 황금색에만 시선이 머물면 그 안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다. 가을의 풍성한 곡식은 농부의 땀이 이룬 결실이다. 그것은 고된 노동의 열매고 희망의 내일이다. 일 년 내내 온 가족이 일용한 양식이다.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가, 황금처럼. 멀리 떨어져서 보는 들판은 단지 황금색에 지나지 않지만, 농부에게 그것은 생명이고 삶 자체다.
올해 쌀농사는 풍년이라고 한다. 추수철인 지금 농촌 들판에는 풍년가가 울려 퍼져야 하는데, 오히려 농민의 한숨소리만 높아간다. 어느 누구는 추수를 포기한 채 무르익은 벼를 논바닥에 갈아엎어버렸다는 뉴스도 들려온다. 쌀값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산지 쌀값이 백미 80kg 한 가마에 13만원으로 작년보다 무려 20% 떨어졌다. 여기다가 재고조차 엄청나게 늘어날 전망이라고 한다. 헐값에라도 팔면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 비료값, 농약값, 농기계 사용료 등을 제하고 나면 별로 남을 것도 없을 성싶다. 일당도 나오지 않는 농사지어서 무엇하랴. 한탄의 소리 어찌 높지 않겠는가? 농사지으면서 시세에 속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조상이 물려 준 업인데 하며 마음 달래고 지금까지 왔건만, 갈수록 태산이다. 농사를 버릴까도 생각해 본다.
귀농 인구가 늘고 있다. 언론은 앞다투어 성공적인 귀농을 소개한다. 농어촌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적지 않다. 황토로 집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카메라의 시선은 대부분 농촌의 겉모습에 머물고 만다. 마치 귀농은 여생을 고상하고 건강하게 보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낭만과 휴머니즘이 넘쳐난다고 호들갑을 떤다. 농촌에서 나는 먹을거리는 무공해라서 만수무강을 보장하는 보약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농촌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니다. 햇볕에 탄 검붉은 농부의 얼굴을 건강의 징표로 읽지 마라. 이마의 깊은 주름 뒤에 숨은 힘든 노동과정을 보지 못하고, 농촌 생활을 전원 생활로 착각하는 것은 허위다.
올여름 일흔이 다 된 고향의 형님이 방천길에서 경운기를 운전하다가 사고로 머리를 다쳤다. 다행히 냇가 물속에 빠져 큰 부상은 입지 않은 모양이다. 형수는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늘 병원을 다닌다. 갈 때마다 무릎에서 물을 한 그릇이나 뺀다고 한다. 이웃집에 사는 형님 친구 한 사람은 폐암으로 삶을 포기한 상태다. 또 한 사람은 결국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하고 대구의 병원에 입원해 있다. 70평생 한시도 농사를 손에서 놓지 않은 사람들이다. 밭고랑에 엎드려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일해 왔는데, 어찌 허리와 무릎이 온전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도시로 나가지 못하고 조상이 물려 준 땅을 지켜온 어리석음 탓이다. 농사는 경제개발 과정에서 늘 뒷전으로 밀려났고, 농민은 병든 몸과 농협의 빚만 짊어진 채 늙어가고 있다.
'4대강 살리기' 바람이 고향 산골에까지 불어온 모양이다. 냇가에 있는 형님의 논 사분의 일 정도가 하천 둑으로 수용되고 말았다. 나락이 한창 익어가는 논 가운데에 일렬로 꽂힌 붉은 깃발이 가슴에 박은 대못처럼 느껴졌다. 뼈 빠지게 고생하여 마련한 옥답이다. 그 땅에서 키운 마늘 덕에 자식들 공부시키고 출가도 시켰다. 물론 정부에서 보상이야 해주겠지만 자식처럼 애지중지했던 땅이 아닌가? 형님에게 막걸리 한 잔을 권하며 위로의 말을 대신했다. 속내도 잘 모르는 도회인들이 자신만의 취향대로 농촌을 채색하지 않기를 바란다. 황금들판을 보거든 추수가 끝난 후의 황량한 들판도 생각해 보라. 그것이 지금 농촌의 현주소다. 농촌의 진실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만이 황금들판의 의미를 알 수 있으리니.
신재기 문학평론가.경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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