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국, 그리고 나]터키식 바게트 '에크맥'

노릇하게 부풀린 바삭바삭 그리운 맛

한국에서는 절대 먹을 수 없는 것, 오늘 아침엔 고통스럽게도 바로 그게 먹고 싶다. 그리운 그 이름, '에크맥'(Ekmek)이다. 우유의 무거운 맛을 뺀, 소금기도 설탕기도 없는 담백한 터키식 바게트 다. 물과 밀가루로만 반죽해서 이스트로 부드럽게 부풀린 에크맥은 노릇하게 익은 겉면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다. 바삭한 얇은 껍질을 깨자마자 바로 부드럽고 촉촉한 하얀 속살이 나온다. 프랑스식 바게트보다 몽땅하고 둥글넓적하게 생겼는데 반 뚝 잘라 속을 채우면 케밥이나 샌드위치가 되고, 손으로 찢어 반찬국물을 찍어먹으면 우리나라 밥상의 쌀밥처럼 든든한 밥이 된다.

에크맥은 갓 구워낸 게 제맛이다. 이른 아침 빵가게를 지나면 트레이 층층마다 빼곡하게 쌓여 노릇하게 익어가는 에크맥들이 참새들의 방앗간처럼 나를 유혹한다. 그 구수한 냄새는 압력밥솥에서 뜸들이고 있는 쌀밥 냄새보다 훨씬 유혹적이다. 에크맥은 하루 세끼 밥상마다 올라가기 때문에 집집마다 하루 10개 이상은 뚝딱 먹는다. 그래서 아파트엔 에크맥 장수들이 새벽마다 배달을 간다. 그 풍경이 또 가관인데, 10층 베란다에서 줄로 묶은 양동이에 돈을 담아 내리면 에크맥 장수는 갓 구운 에크맥을 실어준다.

갓 구운 에크맥을 제대로 맛보려면 아침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터키의 아침 밥상은 그야말로 '한상 가득'이다. 양젖으로 만든 치즈와 버터, 끓인 양젖의 단백질 덩어리(이걸 에크맥에 찍어먹는다), 꿀, 딸기잼, 땅콩잼, 초콜릿잼, 삶은 계란이나 오믈렛, 토마토, 오이, 절인 올리브…. 에크맥과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고소하고 달콤하고 싱싱한 먹을거리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절대 빠질 수 없는 건 모양도 색깔도 꼭 두부 같아서 두부처럼 잘라 먹는 터키식 치즈. 염도와 재료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지만 대체로 그리스의 페타 치즈와 비슷하다. 얇게 썬 에크맥에 딸기잼이나 초콜릿잼을 바르고 하얀 치즈를 얹어먹으면 전혀 새로운 달콤함과 짭조름함의 조화를 맛볼 수 있다.

한국에선 절대 먹을 수 없는 또 한가지가 생각났다. 에크맥의 환상의 짝꿍, 요구르트. 그냥 요구르트가 아니다. 집에서 직접 양젖을 끓여 발효시킨 진하고 시큼하고 고소한 요구르트다. 둥글넓적한 접시에 담아 커다란 밥숟가락으로 푹푹 떠먹는 시큼하고 부드러운 맛. 터키인에게 요구르트는 우리의 김치처럼 밥상에서 빠질 수 없는 반찬이다. 그들은 밥 한술 떠먹고 요구르트 떠먹는(거기에다 치즈 한 쪽도 먹고) 상상 불가능한(?) 맛을 즐긴다. 매일 하루 세끼 요구르트를 먹기 때문에 위장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는다. 요구르트를 면 보자기에 싸서 밤새 걸어두면 물은 빠지고 생크림 같은 덩어리만 남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요구르트 크림을 다음날 아침에 딸기잼과 함께 에크맥에 발라먹으면 완전히 밥도둑이다. 요구르트를 물에 타서 소금을 뿌리면 시원한 여름음료 '아이란'이 된다. 아이란도 에크맥으로 만든 케밥 샌드위치의 훌륭한 짝꿍이다.

하지만 에크맥과 유별난 궁합을 자랑하는 마실거리는 따로 있다. 아니, 이것은 그냥 터키인과 찰떡궁합이다. 터키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하루 종일 마시는 터키식 홍차 '차이'(Chai). 밥상 앞에서도 한번에 네다섯잔은 기본이고, 일터에 가든, 친구를 만나든, 심지어 슈퍼마켓에 가거나 버스를 타든, 어디든 앉기만 하면 차이를 찾는다. 그래서 전국 어디든 골목길 구석구석 차이 배달꾼 없는 곳이 없다. 그들은 펄펄 끓는 찻주전자에 진하게 우려낸 적갈색 찻물을 물과 섞어 찻잔에 따른다. 차이를 너무 진하게 많이 마시는 건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유별나게 호연지기를 자랑하는 터키남자들은 대부분 여자들이나 아이들보다 더 진하게 마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터키 차의 대표주자는 '차이'이지만 시장의 차 가게에서 우리 눈을 사로 잡는 건 수십가지 종류의 알록달록한 과일차들이다. 애플티, 피치티, 바나나티, 오렌지티 등등 온갖 과일차들이 있는데 그 맛은 왠지 어린 시절 학교 앞 문방구에서 엄마 몰래 사먹던 불량식품 맛을 닮았다. 하지만 그 중에 제일 유명한 '애플티'는 마시자마자 내 입맛을 사로 잡았다. '애플티'라고 부르는 이름도 정겹지만(터키어로는 '엘마차이'. 여행자들 사이에서 '애플티'로 통함), 터키의 추운 겨울을 녹여주는 달큰하고 따뜻한 맛은 술 마신 다음날 꿀물을 마시는 것처럼 온몸에 기분 좋은 온기를 쫙 퍼뜨려주기 때문이다.

하루 지난 에크맥은 눅눅해지고 얼핏 시큼한 냄새도 밴다. 겨울에는 눅눅해진 에크맥을 난로 위에 얹어 다시 바삭하게 굽는데 이 맛이 또 일품이다. 식구들이 둘러앉은 밥상 옆에서 아빠 앞에 하나 아들 앞에 하나씩 에크맥을 바로바로 구워서 나눠주는 엄마의 정겨운 손 맛이다. 가끔씩은 별미로 에크맥에 달걀옷을 입혀 기름에 굽는다. 프렌치토스트로 변신한 에크맥에 딸기잼을 발라 차이랑 함께 먹으면….

아, 왜 한국에는 이 맛이 없을까. 오늘 아침에도 식빵이나 구워야겠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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