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국, 그리고 나]이탈리아 포지타노

눈 감으면 떠오르는 지중해의 스크리마스

또다시 12월이다. 도시의 크고 작은 거리들이 들떠있다. 작년의 그 사람, 정겨운 그 사람의 팔짱을 끼고 걸으면 신선한 찬바람이 코끝에 알싸하게 스민다. 서울의 겨울은 일 년 만에 다시 옷장 속에 넣어두었던 똑같은 크리스마스 옷을 꺼내 입었다. 지나는 곳마다 새빨간색, 진초록색, 솜털 같은 하얀색이 스쳐간다. 익숙한 빌딩들이 반짝이는 빛들로 옷을 갈아입고 스쳐간다. 종소리와 음악들, 술기운에 발개진 얼굴들이 스쳐간다.

하지만 내 마음의 옷장 안에는 특별한 옷들이 있다. 세계의 온갖 도시에서 가지고 온 각각 다른 모양과 다른 색깔의 크리스마스 옷들이 감춰줘 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옷장을 열고 그 중에 하나를 꺼내어 입는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 오래도록 내 발길을 붙든 그림이 있었다. 노을이 익기 전 노랗게 번지는 오후의 색깔이 몹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고대의 성벽이 서있는 골목길, 그림의 왼쪽 반을 차지한 성벽은 햇볕을 받아 환하게 밝고, 오른쪽 반을 차지한 성벽은 완전히 칠흑처럼 컴컴한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두 성벽이 만나는 저 너머의 아득한 소실점 뒤에 광장이 숨어있나 보았다. 광장에 가득한 햇살이 샛노랗게 소실점을 비집고 나오며 골목길을 가로질러 그림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광장에는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누가 있을까. 아니면 텅 비어 있을까. 광장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상반신 그림자가 마치 '이쪽으로 와'라는 듯이 골목길에 삐져나와 있다. 그리고 바로 골목길 이쪽 끝에서 한 여자 아이의 그림자가 광장에서 유혹하는 남자의 그림자를 향해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온다. 보이지 않는 광장도 보이는 골목길도 적막하기만 하고 굴렁쇠 굴리는 소리만 맑고 쩌렁하게 울린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도시의 적막함,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어린 시절의 그리움이 감도는 골목. 초현실주의 화가 조르조 데 기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수'라는 작품이다.

얼마 후 나는 드디어 기리코가 그린 이상한 고독과 그리움의 햇살을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그토록 휑하고 높은 성벽과 골목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묘하게 외로운 샛노란 햇살은 지구에서 오직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것이란 걸 알았다. 그곳은 지중해의 도시들이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터키의 도시들. 신화와 넓고 높은 성벽을 가진 고대유적과 광장들과 오래된 골목길, 그리고 지중해의 햇살이 함께 만들어내는 마법이다.

그 골목과 그 햇살의 색깔은 너무 신기하게도 흑백사진 속에서도 느낄 수 있다. 몇 년 후 나는 포토저널리스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흑백사진들 속에서 그 오후의 샛노란 색깔을 발견했다. 컴컴한 그림자를 입은 높은 담벼락과 환한 햇살을 입은 담벼락 사이 텅 빈 골목 저편에 조그만 아이가 마치 담벼락에 붙은 그림자처럼 수레를 끌다말고 멈춰 서 있다.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엇!'하고 소리 질렀고 아니나 다를까 이탈리아 살레르노의 풍경이었다. 나는 얼른 내 마음의 옷장 세 번째 서랍장을 열고 브레송의 사진을 기리코의 그림, 이탈리아의 골목길과 함께 넣어두었다.

지중해를 여행하던 그 해의 크리스마스 무렵에 나는 '포지타노'라는 아름다운 이탈리아 도시를 찾아 나섰다. 중부의 로마에서 남부의 나폴리까지 기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꾸불꾸불한 지중해의 해안도로를 달리면 멀리 새하얀 집들이 모여 있는 달력 같은 마을이 나온다. 컴컴한 절벽에 밝은 햇살들이 매달려있는 것처럼 파란 바다를 굽어보며 집들이 매달려 있다. 버스에서 내리자 골목길의 하얀 벽들에 깊은 그림자와 짙은 노을이 손을 잡고 성큼 들어와 있었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버스정류장의 작은 기념품 가게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그 특별한 샛노란 햇살이, 키리코의 그림이, 브레송의 흑백사진이 바로 지중해의 크리스마스가 입는 옷이었다.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이 여기저기서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어딘가에서 치마를 입은 여자 아이 한명이 까르르 웃으며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 나올 것 같았다. 여행이 나에게 준 선물들, 내 옷장의 풍성한 옷들 덕분에 나만의 크리스마스는 매년 특별하고 매년 색다르다. 눈만 감으면 나는 지중해의 크리스마스를 꿈꿀 수 있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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