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군의 원수를 갚을 것을 굳게 결심한 오오이시는 임신한 처 리쿠와 4월 15일에 이혼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처자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누를 사전에 제거했던 것이다. 6월 24일에 100일 법요를 마친 이들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끼리 서약을 하고 제각기 흩어져 '기라'가 사는 지금의 도쿄인 에도를 향한다. 그리고 그들은 에도에 올라가서 의사, 안마사, 낭인(浪人), 옷집, 쌀집, 검술 사범, 술집 등의 각가지 방법으로 잠복 생활을 하면서 '기라'에 대한 제반 정보를 수집한다. 어떤 자는 '기라'저택의 가정부에게 접근하여 건물의 구조를 알아내고, 어떤 자는 '기라'의 다도 스승의 제자가 되어 '기라'의 주변을 탐색하고, 어떤 자는 '기라' 저택의 뒷문 근처에 쌀집은 내고서 정탐하는 등의 현대 스파이전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동지들은 탈락해 그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해 12월 오오이시 이하 47명의 동지들은 '기라' 댁에서 차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후카가와(深川)의 찻집에 모여 마지막 돌입 작전회의를 열고 12월 14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거사 전날인 13일에는 에도에 큰 눈이 내리고, 살을 에는 듯한 한파가 밀어닥쳤다. 그들은 두 곳의 약속 장소에 모여서 출진연회를 가진 후, 자정이 지날 무렵 전투준비를 마치고 오전 4시쯤 '기라'저택의 정문과 후문 양쪽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사다리를 놓고 높은 담을 넘어서 침입한 무사들은 저항하는 자들을 처치하면서 40개가 넘는 방들을 샅샅이 뒤져, 끝내 '기라'를 찾아 그 목을 베었다.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였으며, 오전 7시쯤 주군 아사노의 묘소에 기라의 목을 놓고 한 사람씩 분향을 하고 나서, 전원 관가에 자수한다. 에도성은 이런 일련의 사건보고를 들은 뒤, 중신들의 의견은 양분되었다. 옹호파들은 47인의 충신의 출현은 유교가 왕성한 증거로 정치 도의상 바람직한 것으로 충효의 기개가 큰 것을 고려해서 '문제는 있지만 무죄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처벌파들은 막부의 허가없이 원수를 갚는다고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지만 주군을 위한 의로운 행동은 정으로써는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할복에 처하면 '기라'측의 면목도 유지되고 무사들의 충의심도 중히 여기는 것이 되므로 여기서는 '사정(私情)을 떠나 천하의 법의 권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쇼군은 처벌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50일 후인 2월 14일, 47인의 사무라이들은 모두 할복으로 끝을 맺는다.
그 후 '사무라이 하면 주신구라'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귀감이고, 주군을 위해 가족도, 사랑도, 부귀영화도, 모두 져버리고 돌진해간 이들 '47인의 사'는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매번 똑같은 것을 보면서 감동의 눈물은 흘리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사랑을 바탕으로 한「춘향전」과 충성을 바탕으로 한「주신구라」의 횡과 종으로 엮어진 두 사회, 두 나라를 발견한다. 사랑은 개인을 중시하고 충성은 전체를 중시하는 것인데, 개인을 우선하는 게 좋은지, 공동체를 우선하는 게 좋은지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사랑과 충성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길까? 경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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