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행-경북을 걷다] <1>상주, 경천에서 비봉까지

숨은 길 열던 날, 걸음걸음 내 가슴도 같이 열렸다

대 솔숲길=얕은 구름이 드리운 날 이곳을 찾았더니 쓸쓸함이 걸음걸음마다 묻어난다.
대 솔숲길=얕은 구름이 드리운 날 이곳을 찾았더니 쓸쓸함이 걸음걸음마다 묻어난다.
비봉산 전망데크=해발 230m 비봉산을 오르면 낙동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데크가 있다.
비봉산 전망데크=해발 230m 비봉산을 오르면 낙동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데크가 있다.
비봉산 이무기=비봉산 능선길에서 만난 재미난 바위.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는 이렇게 생겼을까?
비봉산 이무기=비봉산 능선길에서 만난 재미난 바위.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는 이렇게 생겼을까?

매일신문은 새해를 맞아 신년 기획 시리즈로 '동행-경북을 걷다'를 시작합니다. '걷는 곳이 곧 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번 시리즈는 유명 관광지를 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경북도내 23개 시·군의 산길과 들길, 강길 등 '숨은 길'을 찾고자 합니다. 딱히 순서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제법 이름난 곳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겨울에 소개한 시·군은 여름에 다른 길을 찾아 다시 방문하려 합니다. 자생적 창작 스튜디오인 아트빌리지 입주 화가 10명이 기꺼이 '동행'을 허락했습니다. 작가들은 52주간 현지 답사를 통해 아름다운 경북의 풍광을 화폭에 담습니다. 그렇게 모은 작품 50여점을 2010년 12월 둘째주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전시하며, 작품 판매를 통해 거둔 수익금은 전액 어려운 이웃이나 난치병 어린이 돕기에 쓸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뜨거운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첫 걸음은 늘 그렇듯 두렵고도 설렌다. 어디서부터 발을 디뎌야 할 지도 걱정스러웠다. 이곳 저곳에 답을 구했다. 지리산이나 제주도까지 가야 걸을 만한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설득하고 이해를 구해야 했다. 가깝지만 몰라서 못 간다고 생각했던 경북의 오솔길 찾기, 처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속은 타 들었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던 중 상주시청에서 연락이 왔다. "무조건 첫회는 상주로 해야 합니다. 준비가 다 돼 있어요." '무조건'이라는 단어는 슬쩍 거부감을 일으켰고, '준비됐다'는 말은 반작용을 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상주시청 문화관광과 전병순 계장. 무작정 달려드는 품새가 그다지 미덥지 못했지만 이것도 인연이다 싶었다. 하지만 만난 지 5분도 채 안돼 '못 미덥다'는 속말을 후회했다. 그는 두툼한 책 보따리부터 안겼다. 상주 관련 자료를 싹쓸이했다 싶을 정도. 상주를 주제로 특집 시리즈를 해도 모자랄 판이다. 특히 상주시가 펴낸 '아름다운 상주의 명산'은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자는 다름 아닌 전병순씨. 20년간 산을 탔다는 전씨는 266쪽짜리 책 한 권에 상주의 모든 산을 아낌없이 담아냈다. 시청 홍보자료는 무료로 나눠주지만 이 책은 1만5천원에 판매한다. 그만큼 자신있게 만든 역작이라는 뜻일 터. 뺨을 때리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상주 걸음을 시작했다.

이번 길의 출발지는 경천대(擎天臺)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나들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경천대 안내판을 찾으면 쉽게 닿을 수 있다. 한겨울 경천대는 스산하다. 하지만 난데없는 객창감을 느끼기에는 철 지난 유원지가 제격이다. 워낙 유명한 곳이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자. 전망대로 오르는 길 쪽에 재미난 것이 눈길을 끈다. 108개나 되는 돌탑이다. 전병순씨가 몇 해 전 이곳 관리사무소장을 맡을 당시 쌓았단다. 이유를 묻자 "모름지기 관광지에는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짧게 답한다. 어른 키 높이만한 돌탑을 108개나 쌓는다는게 어디 쉬운가. 웬만한 장정도 들기 힘든 큰 받침돌을 어떻게 옮겼느냐고 묻자 그저 웃어 보이고 만다. 참 싱거운 사람이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잰걸음으로 3시간이 걸린다는 12km 이야기 길에 아직 접어들지도 못했다. 출발점은 전망대 가는 길의 반대편에 있다. 바닥에 'MRF'라고 페인트로 쓰여있다. '산, 강, 들'을 뜻하는 영어 첫 글자를 따서 이름 지었다. 상주시는 이런 'MRF' 코스를 다섯 곳 정도 만들 계획. 오늘 나선 길은 그 길 중 하나다. 경천대 구름다리를 건너 솔숲길을 따라 허위적 걷다보니 낙동강 구비가 한눈에 들어오는 절벽 꼭대기에 이른다. 낙동강 700리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경치라는 말이 그저 허풍은 아닐 성 싶다. 모래턱이 허옇게 드러난 겨울강은 더욱 쓸쓸하다. 잎새를 다 떨궈버린 나무 가지 사이로 강물에 부딪힌 햇살이 점점이 들어온다. 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숲은 더 깊은 침묵으로 내려앉는다. 잠시 상념에 젖을 새도 없이 길을 재촉한다. 경천대를 내려서면 철조망이 길을 막지만 옆으로 돌아서면 문제없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멀찍이 경천교가 눈에 들어온다. 강바람이 사정없이 볼을 때린다. 아프다. 자전거 도시 상주를 상징하듯 스테인레스로 만든 거대한 자전거 모형이 15대씩 교량 양쪽에 늘어서 있다. 한 대당 1천7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경천교 끝에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자전거 박물관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자전거 도시에 걸맞는 근사한 볼거리가 기대된다.

경천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비봉산 산길이 시작된다. 200m쯤 오르다가 바닥에 표시된 'MRF' 화살표를 따라 산을 타면 된다. 길을 놓치기 쉬운 만큼 바닥 화살표를 유심히 봐야 한다. 직선거리로 100m 남짓한데도 경사가 가팔라서 금세 이마에 땀이 밴다. 이번 코스에서 가장 힘든 구간. 이 곳만 벗어나면 해발고도 230m 비봉산 정상에 이르는 능선길을 탈 수 있다. 호젓함을 만끽할 수 있는 알짜배기 구간. 봄산은 싱그럽고, 여름산은 풍요로우며, 가을산은 다채롭다. 앙상한 나무 가지 사이로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겨울 산도 어느 계절 못잖게 재미나다. 어느 해 분을 이기지 못해 겨울산을 오른 적이 있다. 절반도 못가 가뿐 숨을 몰아쉬었고, 제 풀에 지쳐 마지막엔 기다시피 산을 올랐다. 기침과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내게 겨울산이 한마디 점잖게 건넸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길은 남쪽으로 내닫는다. 능선을 따라 있는 듯 없는 듯 길이 이어지다가 넓직한 임도도 나온다. 4km 가량 얕은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는 내내 오른편에는 낙동강이 유유히 따라 흐른다. 겨울산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던 노루 한 마리가 놀란 듯 멈춰선다. 잠시 경계 어린 눈빛으로 낯선 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숲 사이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본격적인 비봉산 정상 오르기가 남아있다. 상주시는 이곳에 제법 돈을 들여 포장도로와 화장실, 체육시설을 갖춰놓았다. 발목 높이의 낙엽을 밟던 걸음이 콘크리트 포장길을 만나니 그다지 느낌이 좋지 않다. 'S'자가 몇 구비를 치며 오르는 모양으로 길을 닦아 놓았다. 다소 지친 걸음을 재촉한다. 전망이 기가 막히단다.

비봉산 정상에 올라서자 가슴이 탁 트인다. 상주 벌판이 한눈에 든다. 낙동강 가운데 펼쳐진 거대한 모래벌판이 바로 '하중도'(河中島), 즉 강 가운데 있는 섬이다. 겨울에 물이 말라 이웃 강변과 붙어 구분이 힘들지만 여름철 물이 불어나면 마치 섬처럼 7만8천평의 너른 들이 펼쳐진다. 강 아래쪽으로 눈을 돌리자 거대한 크레인이 한창 작업 중이다. 4대강 사업 중 하나인 상주보를 만드는 중. 보가 완성돼 수심이 깊어지면 거대한 모래벌은 사라진다. 언젠가 이 곳을 다시 찾으면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을 터. 해발 230m의 높지 않은 산을 올라 이처럼 좋은 풍광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비봉산만의 자랑이다. 하지만 산자락을 에워싼 콘크리트 포장길은 아쉽다.

이제 경천대로 돌아가는 길이다. 비봉산 중턱에 북서쪽을 바라보며 앉은 청룡사를 따라 제법 가파른 길을 내려서면 낙동강 강변길을 만난다. 비봉산은 온통 역암(礫岩)으로 이뤄진 곳이다. 한때 강바닥에 있던 크고 작은 둥근 자갈들이 마치 콘크리트 속에 파묻힌 듯이 단단한 바위 속에 웅크리고 있다. 역암 속살이 이곳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난 곳을 찾기는 힘들다. 강길을 따라 경천교 쪽으로 걷다보면 드라마 '상도' 촬영지가 나온다. 지친 걸음을 쉬어갈 수 있는 곳. 경천대로 다시 돌아오니 얼추 4시간이 걸렸다. 보다 천천히 쉬면서 걷는다면 하룻길로는 충분하다. 겨울해가 짧은 만큼 도시락을 싸들고 이른 걸음을 내딛는다면 훨씬 좋을 듯 하다. 길 안내를 맡은 전병순씨는 이 곳을 따라 걷고픈 사람이 연락하면 언제든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노을이 지는 낙동강을 뒤로 한 채 걸음을 돌린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상주시청 문화관광과 전병순 054)537-7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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