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눈이 내린다. 십수년 전, 만삭의 몸으로 얼어붙은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 전문의 시험장으로 향하던 날 아침에도 눈이 내렸다. 오늘 눈으로 덮인 하얀 세상은 뱃속의 아이와 함께 걸었던 그날을 생각나게 한다. 고맙고 아름다운 눈이다.
소설 은 이렇게 시작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가와바타는 설국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식에서 '아름다운 일본의 나-그 서설'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일본인의 섬세한 미적 감수성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 바 있다. 그로부터 3년 후 가와바타는 늙고 병든 자신을 실존적 치욕으로 여기고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했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일본의 아름다움을 그토록 칭송했던 그는 어째서 자살했을까. 수상 당시에 그는 죽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음을 생각했더라면 아름다움, 그러니까 '생의지'가 배어나는 그런 수상소감을 밝혔을 리 없다. 그러나 설국을 통해 독자인 우리는 가와바타 안에 숨어있었던 죽음의 징후를 엿볼 수 있다.
흔히 독자들은 설국의 순결에 주목한다. 그 흰 순결의 땅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가와바타의 설국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더러운 오염에서 벗어난 청결의 세계이자 세속과 동떨어진 순수의 장소이며, 동시에 싸늘하고 메마른 동토이자 죽음의 땅이기도 하다.
주인공 시마무라 역시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다. 겉으로는 순백의 가치를 추구하지만, 이면에 냉담함을 지녔다. '뜨겁게 휘감겨오는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코에게는 시마무라의 그 무엇도 전해지는 게 없었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사랑을 일순간의 치정관계로 끝내버렸다. 고마코의 연정을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시마무라의 시선은 또 다른 여자 요코를 향한다. '기차 유리창에 비친 요코의 얼굴을 바라보며, 야산의 등불이 그녀의 눈동자와 겹치는 것을 쳐다보며 가슴이 떨림'을 느끼지만, 요코와도 맺어지지 않는다. 요코는 불이 난 극장에서 추락하여 죽음을 맞는다. 불결함을 태워버리는 불길이나 인간의 추함의 흔적을 없애버리는 죽음은 가와바타의 결벽증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소설 설국의 배경인 눈 역시 세상의 불결함을 용납하지 못하는 작가의 결벽증이 낳은 장치일 수 있다.
가와바타의 순결함에 대한 결벽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아마도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는 두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년 후 어머니마저 잃었다. 조기 부모 상실은 아이의 인격 발달에 치명적인 손상을 준다. 타인으로 향하던 에너지를 안으로 철수시켜서, 점점 내향적인 성격으로 굳어졌다. 열다섯살에 할아버지마저 잃고 천애고아가 된 가와바타는 죽음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가와바타의 청결에 대한 집착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접한 가와바타의 어두운 어린 시절과 연관돼 있을 것이다. 결국 눈의 나라 '설국'은 가와바타가 내면적 황폐함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은둔의 장소였다.
<마음과 마음 정신과 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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