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즐거운 책읽기]노블레스 오블리주 혁명 /최연구 /한울

사회지도층의 보편적 의무와 책임성 강조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법학자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1831년 교도소 실태 조사를 위해 신생국가 미국을 방문했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미국에서 발견한 것은 평등과 개성,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었다. 토크빌의 미국 방문기는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하여'라는 명저로 남게 된다. 그후 유럽에서 미국은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었고, '아메리칸 드림'은 보편적인 꿈이 되기 시작했다.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고 누구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은 바로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었다. 그로부터 180여년이 흐른 2004년, 이번에는 미국의 저명한 석학 제러미 리프킨이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을 선언하며 '유러피언 드림'을 공언한다.

제레미 리프킨은 아메리칸 드림이 개인의 물질적 출세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위험부담, 다양성, 상호의존성이 증가하는 세계에 걸맞은 더 넓은 사회복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반면 유러피언 드림은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내의 관계를, 동화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 삶의 질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줄곧 미국의 압도적 영향 아래 놓여있었던 우리 사회에 최근 몇 년 사이 유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프랑스 국제관계학 박사인 최연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혁명'에서 유럽을 읽어 본다. 쉽고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라는 세 개의 거울을 통해 유럽 사회를 들여다보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찾고자 했다. 책 내용 중 인상 깊었던 몇몇 대목을 소개한다.

정보화 사회 다음에는 어떤 사회가 오게 될까? 덴마크의 롤프 옌센은 세계적인 미래학자인데, 그의 저서 '드림 소사이어티'는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책이다. 그가 미래에 도래할 사회라고 보는 드림 소사이어티는 기업, 지역사회, 개인이 데이터나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를 바탕으로 성공하게 되는 새로운 사회이다. 21세기는 '필요 위주의 정보'에서 '이야기 주도의 상상력'으로의 변화가 기업에 큰 영향을 주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유목, 가상현실, 미로, 네트워크가 미래의 핵심어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문명화된 도시유목에서 박애로 뭉친 새로운 부족이 새로운 신화를 중심으로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글도 흥미롭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제국 1천년을 지탱해준 철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말하면서 유명해진 이 용어는 귀족들(사회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프랑스에서는 지식인의 사회 참여, 즉 앙가주망이 유난히 강조된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이론에 의하면 지식인은 문화 영역에서 권력을 지닌 문화지배 권력이다. 따라서 자신의 지식과 혜안을 사회 이슈 해결에 실천적으로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드레퓌스 사건이나 1968년 사회혁명은 지식인의 앙가주망이 이끌었던 사건이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 외국 군인들이 연고도 없는 땅에서 전사했다. 외국인 전사자 명단에는 유엔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과 중국 마오쩌둥 주석의 외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지도층들은 그렇지 못했다. 가난한 농촌 청년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 가는데 부자들은 도망가기 위해 부산 앞바다에 배부터 띄워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지도층, 상층의 도덕불감증은 오늘날 병역기피 현상이나 권력남용 현상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100여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유럽의 좌파정당들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뚜렷한 이념적 지향을 갖고 정책정당으로서 생명력을 지녀온 좌파정당들은 우파정당과 나란히 발전하며 유럽 정치의 민주주의를 일구어왔다. 대학과 지식인 사회가 살아있고, 과학과 문화를 중요시하며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가는 유럽국가의 다양한 모습들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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