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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겨울꽃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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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현관 앞에는 산수유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붉은 열매 몇 알, 아직도 남았고요. 새봄이 오면 바람을 뚫고 제일 먼저 노랗게 꽃 피우는 저 환한 나무. 꽃 없는 이 계절에 나며들며 그 나무를 올려다보면 절로 봄 울렁증이 돋지요.

노란 봄꽃을 기다리기엔 아직 이른 1월의 휴일 날, 저는 겨울 강바람 앞에 섰습니다. 차갑고도 싱싱한 섬진의 바람이었지요. 지리산과 백운산을 가르며 흐르는 섬진강은 언뜻 잠든 것 같아 보였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강은 며칠 전 내린 눈을 그대로 안고 있어 물빛은 희었지요.

우리 일행은 다랑이 논을 따라 올라가 피아골 골짝 연곡사에 닿았습니다. 일행들이 부도탑 앞에서 서성일 때도 저는 오래된 나무 아래 그냥 서 있었지요. 우리 집 아파트 화단에서 늘 보던 조경수 산수유가 아니고 세월 속에서 오래 견딘 산수유 나무였습니다. 산수유 두 그루는 탑신처럼, 금강역사처럼 연곡사 대적광전 앞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흰 눈을 얹은 가지 끝에 조롱조롱 달린 붉은 열매. 나무가 오래됐으니 열매도 깊게 묵었는지 그 빛깔이 맑고도 환했습니다. 이 겨울 연곡사 법당 뜨락의 산수유는 화엄으로 가는 봄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아, 그 때 저는 반가운 산수유 꽃눈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가지마다 송글송글 옹골지게 맺혀서 말입니다. 저는 겨울꽃눈 하나 몰래 열어 보았지요. 거기 노란 봄이 새 희망처럼 소복하였습니다. 산수유 꽃눈은 겨울 바람을 뚫고 먼 길을 달려 온 제게, 미리 주는 봄 선물이 되었네요. 오래된 이 나무는 지리산 골짝의 바람 속에서 온통 분주하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봄 채비를 하고 있으니 1월 찬 겨울 바람을 지나 봄은 기어코 또 오고 말겠군요. 그렇게 저는 섬진의 강바람이 되어 다가올 봄 속을 환하게 거닐다 왔습니다.

아름답고도 가난한 섬, 아이티. 오늘도 뉴스마다 아이티에서 온 소식들입니다. TV 화면에 나오는 ARS성금에 참여하는 것 말고 내가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말 그대로 생지옥인 그 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눈빛은 포기하지 않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단단한 그들의 눈빛에서 저는 절망이라는 빈 가지에 달린 겨울꽃눈을 보았습니다. 겨울꽃눈에서 피어나는 어린 꽃처럼 그들의 무너진 가슴에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여린 싹이 달려 있으니 이제 저들에게 다시 희망을 물어야겠습니다.

멀고 아름다운 나라, 그 곳에도 조금만 더 관심을 보태면 봄이 오듯 희망은 신의 손길을 이끌고 그렇게 올 것입니다.

다시 희망을 묻는 제 마음에도 겨울꽃눈이 환합니다. 머지않아 꽃 피겠지요.

김승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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