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시래기

끼니도 되고 반찬도 되는 '요술쟁이'

'나는 죽이며 국이며 반찬이니라.'고 읊으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성경 말씀과 사뭇 닮은 데가 있다. 주어인 '나'를 '씨래기'(시래기의 사투리)로 바꿔보면 이해하기가 매우 쉽다. 겨울 한철 시래기는 서민의 반찬이었고 때론 끼니가 되기도 했다.

초겨울 김장철이 되면 밭에서 들여온 배추와 무를 건사하는 일로 집집마다 바빴다. 정품에 해당하는 것들은 김장김치와 물김치 거리로 뽑혀나가 다듬어지고 절여져 깊게 파진 응달의 김치 독에 묻힌다. 못생기고 발육 상태가 나쁜 것들은 무청과 함께 허드레 김치로 담가지지만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실온에서 익어 일찌감치 변소를 거쳐 두엄더미 위에 올라앉게 된다.

남은 무와 배추는 배추뿌리와 함께 땅속 무구덩이에 갈무리되어 다음해 봄을 기다려야 한다. 김장을 담그고 남은 배추의 겉잎과 무청은 세 가닥 볏짚에 굴비 두름처럼 엮어져 지붕 밑 처마 밑에 걸리게 된다. 무청은 아름다운 설치 미술품처럼 내걸려 북풍한설 속에 몸을 맡기고 나면 끼니도 되고 반찬도 되는 요술쟁이 시래기가 되는 것이다.

##쓰레기가 웰빙 변신 '조상의 지혜'

쓰레기나 다름없는 무청을 최고의 웰빙 식품인 시래기로 만든 것은 순전히 우리 조상들의 지혜 덕분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우리처럼 폐품을 양질의 식품으로 만드는 나라는 없다. 그들도 멀쩡한 우유를 나무통에 부어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저어 치즈를 만들거나 생고기를 연기 나는 천장에 매달아 훈제라는 음식을 만들어 먹긴 한다.

## 뿌리'껍질째 먹는 것이 건강식

세계적으로 이름난 장수마을들은 무 잎을 시래기로 만들진 않지만 곡물의 껍질을 완전히 벗겨내지 않고 거친 상태로 먹거나 산나물이나 자연에서 채취한 채소들을 뿌리째 또는 껍질째 먹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오키나와, 이탈리아의 캄포디멜라, 그루지야의 코카서스, 파키스탄의 훈자, 에콰도르의 빌카밤바, 불가리아의 로도피, 중국의 바마와 루카오 지역이 대표적이다.

훈자에선 보리가루나 밀가루 반죽으로 구운 차파티를, 빌카밤바에선 감자와 옥수수를, 오키나와에선 고구마와 콩을, 불가리아 그루지야 프랑스 남부에선 통밀로 만든 거친 빵을 주식으로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건강식이다.

우리도 옛날에는 씨눈이 붙어있는 현미에 가까운 쌀을 먹었으며, 보리를 도정할 때 나오는 보릿겨로 개떡을 쪄먹고, 시래기를 삶아 국과 찬을 만들어 먹을 땐 당뇨 대장암 같은 식습관 잘못으로 오는 성인병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씨눈 없는 흰쌀과 패스트푸드 유전자 변이식품 등을 상식하고 있으니 비만 환자와 각종 암환자가 병원마다 넘쳐나고 있다.

우리의 식생활을 옛날로 돌릴 수는 없을까. 과거로의 회귀가 불가능하다면 농약 방부제 향료 인공색소에서 다소나마 해방되고 패스트푸드와 가공식품을 줄이는 동시에 햇볕을 쪼인 제철 음식의 비중을 높인다면 질병 천국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시래기 넣은 고등어 조림 '최고의 맛'

나는 입맛이 시골 음식에 길들여져 있는 촌놈이다. 요즘도 된장과 김치 외에 시래기만 있으면 고기반찬은 별 필요가 없다. 아침 밥상에 오른 씨락국은 정말 맛있고 시래기를 두툼하게 깔고 싱싱한 고등어 한 마리 뭉툭뭉툭 썰어 졸여 놓으면 이 보다 더 맛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철학자 루소는 행복의 정의를 '많은 돈, 좋은 음식, 우수한 소화능력'이라고 했지만 나는 소화능력을 뺀 나머지 조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영화 카사블랑카의 여주인공 잉그리드 버그만(일사 런드 역)은 '행복은 건강과 나쁜 기억력'이란 촌철살인의 명언을 남긴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나쁜 기억력이 순기능으로 작용하면 그게 바로 행복열차의 차표인 것이다. 시래기를 최고의 명품 음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나의 입맛은 '좋은 기억력'의 소산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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