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 함께] 시에 대한 각서 / 이성복

당신은 명절 다음 날의 적요한 햇빛, 부서진 연탄재와 삭은 탱자나무 가시, 당신은 녹슬어 헛도는 나사못, 거미줄에 남은 줄무늬 나방의 날개, 아파트 담장 아래 서서히 바람 빠지는 테니스공, 당신은 넓이와 깊이, 크기와 무게가 없지만 그것들 바로 곁에, 바로 뒤에 있다 신문지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연필로 그리면 남는 공간, 손은 팔과 이어져 있기에 그림은 닫히지 않는다 당신이 흘러드는 것도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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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다음 날 빈 마당의 햇빛에는, 겨울의 끝자락과 아직 오지 않은 봄을 예감하는 기운이 동시에 스며있는 탓일까,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미(機微) 같은 게 있다. 시인은 그 기미를, 명절이 아니라 명절 다음 날의 적요한 햇빛을, '당신'이라 의인화 한 시의 본질로 꿰뚫어보고 있다. 시란 이를테면 그런 거다. 명절이 아니라 명절 다음 날의 적요한 햇빛!

시란 그런 것이다. 시란 범속(凡俗)의 하잘 것 없는 것들의 "바로 곁에, 바로 뒤에" 있다. 그 바로 곁에 몸 닿아 있어 괴롭고, 그 배후/이면에 드리워진 한계와 질곡을 고스란히 들여다보는 것이어서 슬프다. 동시에 시가 흘러드는 곳이란 닫히지 않는 그림 같은 그런 곳. 이른바 '열린 의식'의 틈새나 '사유의 확장'을 통해 초월이 아니라 포월(葡越)을, 소외가 아닌 소내(疎內)를 지향하는 것이 시이다. 시인은 언어가 어떻게 그 넓이와 깊이, 크기와 무게를 포월하고 소내하는지를 바로 곁에서, 혹은 그 이면의 심연을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는 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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