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행의 시대] (1)에펠탑, 가상현실과 여행

위풍당당 파리의 상징은 너무나 작았다

파리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에펠탑'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에펠탑이 너무나… 작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내 상상 속의 파리에는 로맨틱하게 일렁이는 불빛들, 꿈꾸는 연인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휘황찬란하게 우뚝 서있는 에펠탑이 있었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파리를 조명할 때면 늘 공중에서부터 지미짚 카메라가 파리 시내를 몇 바퀴 휘돌아 내려오며 위풍당당한 에펠탑을 클로즈업한다. 카메라가 에펠탑을 향해 '빙~' 돌아갈 때부터 파리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과 낭만적 감수성이 들끓기 시작한다. 파리는 곧 에펠탑이고 에펠탑은 곧 파리였으며, 에펠탑은 파리에 대한 모든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나는 파리에 가면 몽마르트 언덕이든 센강이든 생라자르역이든 도시 구석 어디에서나 에펠탑이 보일 줄 알았다. 그러나 에펠탑은 지하철을 타고 직접 가보지 않는 이상 퐁피두센터나 오르세미술관 옥상에나 올라가야 겨우 보일 뿐이었는데, 그나마 파리에 그다지 높은 빌딩들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마저도 숨은 그림 찾기처럼 어려웠다. 파리의 빽빽한 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겨우 뾰족한 정수리 하나를 삐쭉 내밀고 있는 게 에펠탑이었다.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순간, 내 맘 속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튼튼하게 축조되어 있던 파리에 대한 낭만의 탑은 어이없이 무너져 내렸다. 대체 파리에서 뭘 보아야 한단 말인가. 이

것은 파리가 아니다. 영화 속의 파리, 영화 속의 에펠탑이 바로 파리이고 에펠탑이다.

스크린이 발달한 시대에, 과연 지구 어딘가 신세계가 남아있을까. 우리는 이미 텔레비전에서, 영화관에서, 훌륭한 사진들이 실린 신문에서, 세계를 모두 보아버린다. 그곳으로 가기 전부터 우리는 그곳에 대한 모든 시각적 정보를 얻고, 이미 생각 속에 견고한 이미지의 탑을 쌓아올린다. 이제 모험심을 들끓게 하는 '미지의 신세계'란 없다. 여행은 내가 스크린에서 얻은 가상의 시각적 정보들을 모아서 상상으로 쌓아올린 이미지의 탑이 정말로 그 곳에 존재하는지 '실재성'을 확인하러 가는 절차일 뿐이다.

때로는 가상과 현실이 역전되기도 한다. 내가 파리에 가고 싶은 이유는 영화에서 이미 파리를 보았기 때문이며, 그것도 그냥 파리가 아니라 영화에서 보여준 꼭 그대로의 '에펠탑이 서 있는 파리'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여행은 스크린의 사각 틀로 자른 면만, 에펠탑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어느 한 귀퉁이만을 파리로 욕망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에펠탑을 '보았기' 때문에 에펠탑을 '보러 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세계를 사각의 틀 안에서만 보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새로운 무언가를 보면 '새롭다, 신기하다'고 느끼기 전에 먼저 카메라부터 들이댄다. 무엇이든 카메라의 사각 프레임 속에 담아서 보아야 '보는 것'이다. 이미 스크린에서 볼 것 다 본 화려한 스펙터클보다 영락없이 시시하기만 한 에펠탑을 마주하고 여행자는 할 일이 없다.

아니, 한 가지가 있다. 내가 가진 좀 작은 스크린에 다시 담는 작업이다. 사진 찍기가 그것이다. 사진은 외부의 스크린으로 본 가상현실을 나의 미니 스크린에 다시 카피한 가상현실의 카피본이다. 그러니까 여행자들의 카메라를 통해 에펠탑은 무한히 카피되어 얼핏 닮았으나 어느 귀퉁이를 잘라내느냐에 따라 무한히 다른 가상현실들을 마구 재생산해낸다. 그래서 누군가는 누군가가 잘라온 에펠탑의 뒤통수, 에펠탑의 다리 한 쪽, 에펠탑의 정수리 귀퉁이를 보고 파리를 찾아온다. '애걔, 에펠탑 다리가 정말 긴 줄 알았는데 요렇게 짧아?'라고 실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억울하다. 파리를 즐길 나의 소중한 권리를 저 스크린이 빼앗아 간 게 아닌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구석구석에 멋들어지게 설치되어 있는 수많은 스크린들이 나의 감동을 도둑질한다.

20세기 신세계 탐험은 이제 종말을 고한다. 아직도 들끓는 열정을 참지 못하는 탐험가는 카메라가 미치지 못한 오지 중의 오지, 혹은 저 우주 밖으로 틈새시장을 노리지만 그마저도 옛날만큼 흥미진진하지 않다. 여행의 시대는 끝났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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