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서 87개소, 헌병대 72개소, 면사무소 77개소 파괴 또는 방화' 3·1운동의 격렬했던 상황을 말해 주는 통계이다. 일제의 경찰관서, 헌병대, 면사무소가 파괴되고 불에 탔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뭐 새로울 게 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총칼로 상징되는 경찰관서와 헌병대는 그렇다치고 면사무소는 왜 응징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알면 소름끼칠 정도로 일제의 철저한 통치방식의 실체와 이에 저항했던 우리 조상들의 생생한 모습들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면사무소가 최일선에서 대민 업무를 보기 시작했던 것은 일제 초의 일이다. 일제는 1910년 강점 직후 면사무소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였고 1917년에 이르러서는 면제(面制)라는 일종의 법령을 발포하여 면사무소의 역할을 강화했다. 면사무소가 대민 통제는 물론 호구 파악과 징세에 이르는 말단 행정 업무를 전담하는 곳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뇌리에는 면사무소가 행정의 말단기관이라는 상이 남게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그 기본 골격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강점 초기단계에서의 면사무소는 사실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다. 조선시대까지 우리 조상들은 동리를 생활터전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었고 이를 통치하는 것은 면이 아니라 군(郡)이었다. 동리에는 동약(洞約) 혹은 동회(洞會)라 칭하는 일종의 자치조직이 있어 존위(尊位)와 동장(洞長)이 마을의 일을 돌보았다. 동회는 마을의 수리나 산림이용, 농사일의 품앗이는 물론 심지어 부부싸움을 중재하는 일까지 도맡아 하였고 연말에는 대동회를 열어 마을의 결속을 다졌다. 군에는 군청이 설치되어 나라에서 임명한 군수가 통치업무를 관장하였지만 이 군청에는 각지의 동회를 대표하는 좌수(座首) 또한 함께 근무하여 군수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제 이전만 하더라도 군청을 매개로 하여 국가의 통치와 지역의 자치가 조화를 이루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동리와 군의 자치를 주도해왔던 각 지역의 명망 있는 인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다양한 유인책을 썼다. 작위와 관직, 이른바 은사금 지급 등과 같은 것이었다. 일제는 이들을 회유, 포섭하여 조선 통치의 수단으로 삼으려 하였던 것이다. 좌수와 각 동리의 존위를 포섭하면 기존의 자치조직을 그대로 일제의 통치조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점에 저항하여 순국조차 마다않던 지역의 명망가들이 유인책에 넘어갈 리 만무했다. 일제는 이들을 포섭하여 기존의 자치조직을 점령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의 말단 통치조직으로 새로이 부각된 것이 바로 면사무소였다. 군과 동리의 자치조직이 말을 듣지 않으니 면이라는 단위를 부각시키고 면사무소를 첨병으로 하여 조선의 지방사회를 장악하려 했다. 이렇게 하여 면사무소는 경찰관 주재소, 헌병대 지소와 더불어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운영하였던 핵심기구의 하나가 되었다.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자치질서를 파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1914년부터 단행된 행정구획 통폐합조치가 그것인데 이 강제 통폐합으로 인해 조선사회의 질서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자료를 종합해 보면 일제는 1913년부터 총독부 내무부 지방국 제1과와 제2과에서 군, 면, 동리의 통폐합을 위한 준비를 치밀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내무부장인 우사미 가츠오(宇佐見勝夫)와 지방국장 오하라 신조(小原新三)가 집행의 중추역할을 맡아 군·면뿐만 아니라 동리 단위의 지도 초안까지 만들어 통폐합을 강행했다. 그 결과 군은 317곳이 220곳으로, 면은 4천336곳이 2천522곳으로, 동은 6만여곳이 2만8천여곳으로 통폐합되었다.
구획 통폐합은 심각한 문제다. 동리는 2, 3곳이 하나가 되었고 면은 2곳 정도가 하나로 통합되자 우선 기존의 동리장과 면장 중 누구는 남고 누구는 직을 잃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버리는 차원이 아니라 일제는 이 과정을 통해 친일적 인물들을 대거 새 면장에 임명했다. 1914년의 경기도의 경우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행정구획 통폐합과 동시에 62%의 면에 신임 면장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행정구획을 통폐합하고 동장, 면장을 교체함으로써 친일적 인물들에 의한 말단 통치체계를 구축하였다.
이 행정구획 통폐합이야말로 한국민이 나라 잃은 서러움을 피부로 직접 느끼게 하는 대사건이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했다 해도 실제 마을에 지배의 힘이 미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전국적인 수준에서 일제의 지배가 동리까지 미치기 시작한 것은 동리와 면행정구획을 통폐합하면서 면사무소를 신·개축하고 거기에 친일적 인물들을 배치하면서부터였다. 1919년 이전 소요사건 통계를 보면 1914년에 가장 건수가 많은데 이는 행정구획 통폐합이라는 무리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17년에 일제가 새로이 반포한 면제(일종의 법령)는 면사무소를 통한 억압체계를 완성하는 제도였다. 일제는 이 면제의 내용 안에 기존의 동리장을 폐하고 대신 각 동리에 구장을 두도록 하는 내용을 넣었다. 조선시대 이래의 동리 자치를 담당하던 동리장들을 폐하고 친일적 성향의 인물들로 새로이 구장을 임명함으로써 면단위뿐만 아니라 동리단위까지도 직접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다. 친일 구장은 순사와 더불어 일제의 강압통치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고 강점 기간 내내 주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써 일제는 면사무소~구장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강점 통치 체계를 완성하였다.
한국민들은 이러한 일제의 치밀하고, 강력한 지배체제의 구축과정에 맞서 싸웠다. 지역의 자치 운영구조에서 배제된 명망가층은 물론, 동리자치의 주도층들, 일반 농민들 모두가 3·1운동에 함께 참여한 것은 이러한 직접적인 강점 지배에 저항하기 위함이었다. 기존의 자치 주도층들과 농민들은 도시에서의 3·1운동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던 3월 중순부터 4월 하순까지 각지의 시장이나 면소재지에 운집하여 다시 격렬하게 3·1운동을 불지펴갔다. 시위운동을 통해 일제의 지역사회에 대한 강점통치에 저항하고 더 직접적으로는 그 상징의 하나였던 면사무소를 무력화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3·1운동 과정에서 주재소나 헌병대 지소뿐만 아니라 면사무소가 응징의 대상이 된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김익한 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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