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동 예안면사무소는 봉기의 근거지

독립선언문 인쇄·시위 준비 최적 면서기까지 설득, 동참 이끌어내

1974년에 지어진 안동 예안면사무소. 3·1운동 당시 예안면사무소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됐다.
1974년에 지어진 안동 예안면사무소. 3·1운동 당시 예안면사무소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됐다.

예외적이지만 3·1운동 때 면사무소가 방화와 파괴의 대상이 아니라 인쇄소의 역할을 한 곳이 있다. 안동 예안면사무소다. 1919년 3월 17일 예안 장터에서 일어난 시위운동의 배후에는 예안면사무소가 있었다.

시위를 주도한 이동봉(李東鳳), 이용호(李用鎬), 조수인(趙修仁)은 고종 인산일에 서울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각 문중과 동리 사람들을 비밀리에 모으기 시작했다. 이들은 인산 참여자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받고 예안 장날에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뿌리며 3·1운동을 재점화시키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예안면사무소야말로 의심을 덜 받고 인쇄를 비롯한 각종 시위 준비를 해가는 데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했다. 이동봉과 이용호가 중심이 되어 면사무소의 서기와 촉탁들을 설득해 이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결국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예안면사무소에서 만들었고, 이들 면리원들까지 시위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면을 전초기지로 한 일제의 강점 통치에도 이 지역은 진성 이씨, 횡성 조씨 등 명망가들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이들은 조선시대 내내 지역 자치를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약의 시행을 통해 지역사회의 존경 구조를 강고하게 구축하고 있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퇴계 이황과 그 제자들의 자손에 대한 지역사회의 존경은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결국 일제는 면제를 시행하고 구장을 배치했지만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데는 실패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3·1운동이 일어나자 예안면사무소는 일제의 첨병으로서가 아니라 진성 이씨인 이동봉, 이용호와 함께 시위를 주도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고, 같은 안동이지만 임동(臨東)·임하(臨河)·길안(吉安)·임북(臨北)·동후(東後)의 다섯 개 면사무소는 시위대의 방화, 파괴를 피해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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