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민족 배신자 최린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이중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나중에 친일파로 전락한 인사는 박희도, 최린, 정춘수 등 3명 정도다. 최고의 악질 친일파는 최린(崔麟'1878~1958)이었다.

함흥의 중인 집안 출신으로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에서 중학교와 메이지대학을 다녔다. 이때만 해도 열혈청년이라 도쿄에서 대한제국 황실을 모독한 공연장을 습격, 검거되기도 했다. 귀국 후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만나 천도교에 입교했는데 1918년부터 독립 방안을 논의하다가 3'1운동을 구상했다. 운동의 기획과 대중화'비폭력 원칙을 만들었으니 3'1운동의 핵심 역할을 한 셈이다.

2년여간 복역한 후 천도교가 손병희 사망으로 구심점을 잃자,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론을 내세우며 실권을 잡았다. 1934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됐고 내선일체를 설파하며 전국을 누볐다. 항일은 짧았고 친일은 길고 열렬했다.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으나 해방 후 천도교에서 쫓겨나 6'25전쟁때 납북돼 죽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면서 "민족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네거리에서 찢어죽여라"며 고개를 떨궜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박병선 사회1부장

▶본지 3월 1일자 역사 속의 인물 '민족배신자 최린' 내용에서 민족대표 33인중 친일파로 전락한 인사로 '이갑성'을 언급한 것은 잘못이므로 이를 바로잡습니다. (사)민족대표 33인 유족회는 "연당 이갑성 선생의 친일 논란은 방송사의 심층 취재와 2006년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대회'를 통해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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