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 스페인 화가 무리요나 리베라 등은 종종 거리의 부랑아들을 그렸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시대에 그들이 미적 대상에서 벗어난 소재로 눈길을 돌린 것은 의외의 일이다. 미는 소재나 대상의 성질에 있는 객관적인 요소라기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화가의 주관에 일어나는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고 할까. 이미 미술은 꽃이나 보석 또는 궁정의 여인들처럼 귀하고 예쁜 것만이 아니라 천박한 것을 통해서도 전달할 또 다른 가치와 감정을 알게 된 것이다.
헝클어진 더벅머리 장발에 텁수룩한 수염, 내리깐 시선에 꽉 다문 입, 비교적 건장한 골격의 한 사내가 다 떨어진 옷을 걸친 채 양손으로 깡통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은 그저 범상한 걸인을 그린 것이라고만 생각되지 않는다. 그림 좌측 하단에 '48 李快大'라는 서명은 확실한 제작시기를 알려주는데 당시 현실은 김소운 선생의 '목근통신' 어느 글에서 나오듯 해방의 감격이 물러간 거리의 한쪽에 이렇게 구걸하는 걸인들의 빈곤과 간난을 외면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비록 실제의 걸인을 모티프로 그렸을망정 이 작품을 두고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곧이곧대로 그렸다고는 물론 믿지 않는다. 더군다나 사회적 리얼리즘이라는 재현 형식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면 이 작품에서 지나치게 단순한 사실밖에는 해석상 얻을 게 별로 없다. 앞서 자화상에서 동서 두 회화양식의 통합에 대한 그의 신념을 제시했다면, 이 그림은 현실에 대해 느끼는 그의 심경을 심오한 상징주의로 드러내는 면이 있다. 사실주의적으로 묘사돼 있으나 이는 자연주의적 기법이란 의미에서 그렇고, 내용은 당시의 현실을 보는 작가의 착잡한 견해가 숨겨진 매우 상징적인 현실주의라고 하겠다.
팔뚝에 차고 있는 깡통들은 통상 걸인의 모습이라기보다 떨치지 못하는 어떤 욕심 같은 것이 아닐까. 밥그릇을 움켜잡은 손등의 힘줄을 강조한 데서 생존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 자신부터 살아야겠다는 사생결단의 물질적 탐욕과 결코 놓지 않으려는 무언가에 대한 집착도 보인다. 눈은 한쪽을 감은 채 외눈만 부릅뜨고 있어서 멀리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단견을 의인화했거나 혹은 실제로 한쪽 눈밖에 뜨지 못하는 그런 불구의 상태를 비유한 것은 아닌지. 헤진 옷도 누더기라기보다 손상된 자존심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관돼 해방 후 분단된 조국의 안타까운 현실에서 겪는 처절한 심경을 착잡하게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을 글자 그대로의 사실주의나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색채에도 있다.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이 온통 푸른 녹색이라면 이 그림의 주조색은 우울한 갈색이다. 결코 전형성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 아니다. 1948년이면 더욱 고착화되는 분단과 앞날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그리고 불투명한 전망이 단색조의 침울한 색조를 택하게 했다.
그는 해방의 벅찬 감격이 정치적 혼란으로 스러져갈 시기에 새로운 민족미술의 건설이라는 기대를 갖고 북쪽을 방문하였으나, 그곳의 선전 미술에 대해 실망을 안고 돌아왔다. 예술의 실종이 우려되는 북쪽의 현실과 또 정열의 고갈과 패기의 상실로 빠져드는 남쪽의 현실에 함께 개탄하며 그는 구태의연하게 과거에 안주하지 말고 해방 초의 패기와 감격의 열정적인 자세로 창작에 임할 것을 호소했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李대통령, 대북전단 살포 예방·사후처벌 대책 지시
대통령실 "국민추천제, 7만4천건 접수"…장·차관 추천 오늘 마감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