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18일.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 김책 대장은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로 진격하기 위한 제4차 작전계획(8월 공세)을 마련, 금강과 소백산 계선(界線)에 포진했던 4개 돌격사단을 모두 낙동강으로 집결토록 정치 명령을 하달했다. 전선사령부는 이 계획에 따라 주력인 제3돌격사단에 13사단을 합류시키고 그 배후에는 1사단과 15사단을 배치했다.
낙동강을 도하한 후 각 전선에서 정면공격과 측면공격을 연결하여 동시에 대구를 공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적 15사단은 충북 음성의 무극리 전투에서 1개 연대의 전투력을 상실한 데 이어 경북 상주의 화령장에서도 막대한 손실을 입고 사단 해체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적 15사단은 아군과 접전했다 하면 우스꽝스럽게도 아군 장병들에게 일계급씩 특진시켜 주는 이른바 조조(曹操) 군사로 알려져 있을 만큼 방비가 허술했다.
아군 6사단은 개전 초기 춘천의 소양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략적 철수를 거듭하던 끝에 7월 5일 음성에 집결했으나 가엽산에 포진해 있던 적 15사단과 맞닥뜨린다. 적 15사단은 분대장급 이상 상급전사(하사관)들이 모두 중공의 팔로군 출신들로 강력한 조직력과 76밀리 스탈린포 등 중무장한 전투 장비를 자랑하며 콧대가 꽤 센 편이었다.
그러나 개전 이래 줄곧 예비사단으로 후방에 처져 있다가 최고 사령관 김일성의 긴급 출동명령을 받고 최초로 중부전선에 투입되었다. 소양강 전투에서 혁혁한 수훈을 세운 아군 6사단 7연대 예하 2대대는 7월 6일 새벽 5시를 기해 금왕읍 소재지인 무극리를 점령하고 이어 대대장 김종수 소령의 지휘하에 적전 관측이 용이한 가엽산 전방 644고지에 포진했다.
김 소령은 경계 태세에 돌입한 대원들을 격려하며 고지 정상에 오르던 중 뜻밖에도 고지 아래 동락국민학교 교정에 적의 대규모 병력이 집결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즐비한 병력이나 장비로 보아 1개 연대 규모는 족히 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들은 경계를 게을리하며 한가하게 드러누워 있거나 태무심해 보였다. 기습 공격을 가하기에 절호의 기회였다. 대대장 김 소령은 즉각 "전투배치!" 명령을 내리고 5중대와 6중대를 동락국민학교 앞뒤로 배치해 공격에 나서게 하는 한편 7중대는 학교 정문 앞 논바닥에 매복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키로 했다. 하지만 아군 전투 병력은 300여명에 불과했다. 개인 화기를 제외하면 중화기라곤 81mm 박격포 1문과 기관총 2정뿐이었다.
적은 이미 76mm 스탈린포 12문을 배치하고 있었다. 스탈린포가 조준을 마치고 일제히 포문을 열 경우 아군은 여지없이 괴멸당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잠시 망설였으나 결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적의 스탈린포는 포문을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미 공군 전폭기의 기총소사에 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 소령은 침착하게 작전계획을 착착 진행시켰다. 오후 5시를 기해 일제히 공격 명령을 내리고 단 1문뿐인 박격포는 불과 300m 거리를 두고 적의 스탈린 포대를 정조준해 포를 발사했다. "슛!" 하고 포신을 뚫고 날아간 박격포탄은 여지없이 적의 포대를 명중시키고 병사들은 미리 짜놓은 화망 구성에 따라 일제히 집중사격을 개시했다.
태무심하고 있다가 뜻밖의 기습을 당한 적은 응전은커녕 우왕좌왕 흩어지면서 달아나기에 바빴으나 이미 사방이 포위돼 독안에 든 쥐와 다름이 없었다. 곱다시 몰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요행히 정문으로 빠져 나와 큰길로 달아나던 적들도 아군의 집중사격으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벌집이 되어 무더기로 나동그라졌다. 아군의 집중사격은 땅거미가 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길 위에 적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거의 전멸이었다. 아군은 소양강 전투 이래 또 한 차례 승전고를 울렸다.
이 기습작전으로 아군은 적 사살 800여명, 포로 90여명에 노획 무기는 스탈린포 12문과 박격포 35문, 기관총 47정, 각종 차량 60여대 등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 무극리 전투의 대승으로 제7연대는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의 영광을 안았다.
그렇게 1개 연대를 어이없이 잃어버린 적 15사단은 그나마도 2개 연대의 병력과 전투 장비를 추슬러 화령장에서 상주를 점령한 다음 함창으로 진출해 이화령에서 문경, 함창을 거쳐 상주로 밀고 들어오는 1사단과 합류토록 돼 있었다. 이 무렵 아군 6사단은 무극리에서 적 15사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문경으로 철수해 이화령에서 밀고 내려오는 적 1사단을 저지하고 있었다.
한편 충북 진천에서 방어전에 돌입했던 아군 제17독립연대는 7월 17일 오후 "경북 북부의 안동으로 출동하라"라는 육군본부의 작명을 받고 보은에 집결했다. 그리고는 속리산을 타고 비좁은 산길을 따라 충북과 경북의 도계를 넘어 상주 방면으로 이동을 전개하던 중이었다.
선두에서 연대를 인솔하던 김희준 중령은 상주군 화서면 신봉리의 외진 산길을 행군하다 우연히 한 백발노인을 만나 "약 4km 쯤 떨어진 화령장 뒤쪽 달천이라는 개울 건너편에 적이 집결해 있다"는 중대한 제보를 받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한들 이 깊은 산 속에 적이 포진해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전 초 옹진반도에서부터 그동안 패퇴만 거듭해오던 아군으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적 지휘부도 아군이 이 깊은 산골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부연대장이던 김 중령은 평택에서 미 공군의 오폭으로 연대장 백인엽 대령이 부상을 입고 후송되는 바람에 연대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었다. 그는 우선 수색정찰을 실시한 결과 음성에서 아군 6사단에 녹아난 적 15사단의 1개 연대 병력이 달천 동쪽 삼거리와 금곡에 분산, 포진해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1개 사단과 1개 연대의 전투. 상황이 전개되면 으레 적의 지원부대가 증원될 것이고 얼핏 보기에는 애초부터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때론 기적을 이룰 수 있는 운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행운의 여신이 이미 아군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마치 산신령처럼 한밤 중에 외진 산길에 나타난 노인의 제보가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김 중령은 그날 밤중에 적의 반대편인 달천 서쪽 상곡리 고지에 박격포와 기관총 등 연대의 모든 화력과 병력을 배치해 화망을 짜놓고 포위작전에 돌입한 뒤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그 이튿날 동이 틀 무렵 적들이 마을 앞마당에 개인화기와 공용화기를 거치시켜 놓고 비무장으로 달천 개울가에 나와 양치질을 하거나 세수를 하는 등 한가롭게 흩어져 있는 것이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 김 중령은 지체없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아군의 화망구성에 따라 집중사격이 개시되자 날벼락을 맞은 적은 혼비백산해 전투 장비까지 버리고 달아나기 바빴다. 적 1개 대대 병력이 아군의 포위망을 뚫고 금곡리와 예의리 중간 지점인 585고지로 달아나는 것을 아군 1대대와 3대대가 추격해 전멸시켜 버렸다. 적의 시체를 뒤져 보니까 대부분의 상급전사(하사관)들 품 속에서 중공 팔로군의 메달이 나왔다. 무극리에서처럼 자만심에 가득 찬 팔로군 출신의 군사군관들과 상급전사들이 이곳에서도 방심했던 게 분명한 것 같았다.
류창훈 대위가 지휘하는 수색정찰대가 갈령 계곡에 은신해 있던 중 사단 작전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달천으로 오던 적의 전령 2명을 생포해 조사한 결과 사단 주력이 곧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보고를 접한 김희준 중령은 즉각 송호림 소령의 3대대를 적의 주력이 들어오는 길목인 동관리에서 삼거리까지 4km의 계곡에 매복시켰다.
마침 밤새 행군해온 적의 전위부대 2개 대대 병력이 4열 종대로 계곡에 들어서자 송호림 대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방적인 기습공격을 가했다. 무극리에서처럼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이 없었다. 뜻밖의 기습을 받은 적진은 뿔뿔이 흩어지면서 아수라장으로 변해 불과 한 시간 남짓한 교전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달천 건너 금곡리에서는 마침 적 연대장과 참모들이 닭백숙과 닭찜 등이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을 받으려다 아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숟가락도 들어보지 못한 채 달아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일방적인 공격으로 자그마치 1천여명의 적을 사살하고 6트럭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등 대단한 전과를 올리고 2천600여명의 전 장병이 일계급씩 특진했다. 특히 연대장 직무대리로 있던 김희준 중령은 대령 진급과 동시에 정식으로 연대장에 취임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용우(언론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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