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미술에 이쾌대의 '봄처녀'에 견줄 만큼 아름다운 여인 그림이 있을까. 단순한 미인도라기보다 많은 의미를 담은, 신비감을 띤 분위기로 인해 감동적이다. 배경에 펼쳐지는 파노라마 같은 풍경과 인물의 화려한 자태가 발산하는 풍부한 표정이 고색창연한 빛깔의 채색과 함께 시각을 매료시킬 뿐만 아니라 사무치는 마음까지 와닿는다. 바람에 잔뜩 부풀은 치마가 풍만하면서도 나부끼는 자락과 패인 주름이 걸음새의 속도감과 자태를 암시해준다. 내딛는 발걸음에서 경쾌함이 느껴져 정말 저만치 오고 있는 봄의 화신을 직면하는 듯하다.
그리스 조각가들은 움직이지 않는 석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동세의 표현을 연구했다. 그래서 막 걸음을 떼려 하거나 방금 끝나는 동작을 암시하는 자세를 고안해냈는데, 맨살에 찰싹 달라붙는 여신이 걸친 드레이퍼리(주름옷)의 묘사로 역동적인 움직임을 더욱 강조할 수 있게 됐다. 지금 이 작품을 보면 눈이 여인의 걸음걸이 동작 하나하나를 따라 좇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가슴을 내밀고 내젓는 양손은 흔들리는 머리채를 잡으려는 듯 앞으로 모아진다. 전방을 향한 고개와 시선은 다소곳하지만 의연하고 당당해 보인다. 걸음이 나아가는 속도로 배경의 장관이 아득하게 전개되고 있다.
너울거리는 옷자락과 화면의 극적인 요소들에서는 마치 음악적 선율이 들리는 듯 공감각적 요소마저 느끼게 된다. 만약 곡조가 있다면 한을 노래하던 아리랑의 애잔한 가락이 미소를 머금은 밝은 표정을 비추며 환희의 리듬으로 변주될 대목이다. 해방의 감격이 그렇게 오지 않았을까. 간절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오는 희망의 메신저를 이렇게 싱그러운 여인의 모습으로 의인화했다. 해방 전후 그의 확신에 찬 예술의지를 담은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이나 해방 후 비참해져가는 현실의 상황을 은유한 '걸인'과 일련의 상징주의적인 리얼리즘 그림들인 '군상' 대작들을 준비하는 동안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작품 역시 서양의 고전들을 참조했지만 인물의 포즈가 초상화의 정적인 좌상이 아니라 역동적인 동세로 표현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생동감을 더해 줄 색채의 활기가 부족하다고 아쉽게 여길 수 있겠으나 필선을 강조해야 할 필요에 의해, 또는 과거의 시간을 흑백으로 처리하는 영화의 기법처럼, 앞에 다가오는 희망의 뒤편으로 멀리 배경을 페이드아웃시킨 때문은 아닌지. 색채를 되살릴 다음 장면은 어떠할지 기대하게 한다. 이런 해석들이 가능한 데서 한층 그의 지적이고 주체적인 미학적 성취가 돋보인다.
부드럽고 큼지막하게 그려진 손, 그러나 양손의 동작은 성모의 우아한 손가짐을 연습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소묘에서 가져왔다. 반듯한 이마와 가르마에서 두툼하게 땋아 내린 삼단 같은 머리채와 주홍빛 저고리에 흰 치마는 우리의 것이지만, 치맛자락의 나부낌은 마치 바람을 맞으며 뱃머리에 내려서는 니케 상을 연상시킨다. 배경의 사실적인 원경은 한이 서린 정다운 '향토'로 대체한 반면, 하늘과 근경의 애매한 처리는 숭고한 기분이 감도는 낭만주의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어느 것 하나 동서양의 접목 아닌 것이 없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대통령실 "국민추천제, 7만4천건 접수"…장·차관 추천 오늘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