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를 찾아 떠났다. 초여름의 푸름과 무성함에 꼿꼿함이라는 색다른 매력을 기대해서였다. 목적지는 전남 담양. 대나무와 죽세공품으로 교과서에 실리는 곳답게 가는 곳마다 대나무였다.
토요일(15일) 아침 일찍 88고속도로를 달려 2시간 30분만에 담양IC를 통과했다. 인터넷을 통해 샅샅이 훑긴 했지만 초행길은 혼란스러웠다. 코스를 정해 갔지만 도중에 나타나는 표지판들 때문에 엉켜버렸다. 하루종일 돌고 나니 담양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금성산성, 관방제림, 슬로시티 삼지천 마을 등 담양의 이름난 곳을 모두 다니려면 하루로는 버겁다. 1박2일이라면 무난하겠지만 잠자리 걱정하면 여행이 불편하다. 대구에서 담양까지 하루에 돌아오는 코스로 재구성했다. '은일한 선비와 가사문학'의 흔적을 좇는 길이다.
◆죽녹원-대나무 박물관
대나무를 느껴보지 않고는 담양을 다녀왔다 하기 힘들 터. 죽녹원에 가면 실컷 맛볼 수 있다. 담양IC에서 담양읍내로 들어오면 바로 죽녹원이다. 담양에 몇 안 되는 현재형이다. 무려 16만㎡를 대나무밭으로 2003년 5월에 조성했다. 대나무의 고장이라고 하기는 늦은 감이 있지만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기대는 거두길 권한다. 입구에서부터 갖가지 점포와 대통밥집, 노점상과 인파, 전세버스의 행렬에 시달려야 하는 탓이다. 간신히 마음을 풀고 대밭으로 들어서지만 다시 한번 실망한다. 운수대통길, 사랑이 변치않는 길, 죽마고우길, 철학자의 길 따위의 이름을 붙여 자연을 구획한 못마땅함이 눈에 거슬린다.
그래도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대나무들이 주는 상쾌함은 자연 그대로다. 비슷한 시기에 심었겠으나 대나무들은 굵기와 마디 높이, 색깔이 모두 제각각이다. 하늘과 땅과 바람이 뿌리와 잎을 통해 성장시키는 자연의 오묘함이다. 사람 드문 호젓한 산책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대나무끝보다 높지만 작년 한 담양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은 곳이라니 이룰 수 없는 바람이다. 대나무 마디마디에 이름과 하트 표시를 남기는 한국인의 흔적욕(慾)에 새삼 놀라며 빠져나온다.
누정(樓亭)이 몰려 있는 고서면 쪽으로 가는 길에 대나무 박물관이 있다. 대나무의 생태와 효능, 죽세생활공예품 등을 둘러보고 나면 담양 대나무에 대한 공부는 어느 정도 되는 셈이다.
◆면앙정과 송강정
길을 틀어 면앙정(사람인변에 면할면仰亭)으로 향한다. 이제부터 차량에 밀리고 인파에 치이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2009년 담양을 찾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간 곳은 죽녹원(53만명)-소쇄원(13만명)-대나무박물관(13만명)-금성산성(6만명) 순이다.
면앙정 입구 간판을 보고 차를 댄 뒤 잠시 오르니 널찍한 터 북쪽 벼랑 위에 호남제일의 누정으로 꼽히는 면앙정이 있다. 북쪽으로 물이 많지 않아 아쉽지만 무등산 끝자락 제월봉의 넉넉함이 채워 준다. 앞뒤로 100년 넘은 참나무들이 주는 정취가 그윽하다.
담양은 18편의 가사작품을 현재까지 남겼을 만큼 가사문학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다. 16, 17세기 담양의 가사문학을 이끈 선비들 가운데 선배격인 면앙정 송순의 가사 면앙정가를 읽어 본다.
'희황(羲皇) 시절 몰랐더니 지금이 그때로다 신선이 어떻던가 이몸이 곧 신선이구나 강산풍월 거느리고 내 평생을 다 누리면 악양루 위에 놀던 이태백이 살아와도 호탕한 정회야 이보다 더할소냐 이몸이 이러하옴도 또한 임금의 은혜로다.'
사람 없는 정자에 기대어 몇 줄을 읽었을 뿐인데 당시 벼슬에서 떠나 지방에 은둔한 선비들의 심경이 와닿는다. 담양18가사를 미리 적어 간 보람이 충분하다.
송강정(松江亭)은 면앙정의 시흥을 잃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당쟁으로 인해 조정에서 밀려난 정철이 머물면서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지은 곳이다. 탁 트인 전망에 고속도로가 거슬리지만 솔숲에서 뿜어지는 향기와 절절했을 정철의 연군(戀君)을 생각하니 금세 무시된다.
'이 시름 잊자 하니 마음에 맺혀 있어 골수에 사무치니 편작이 열이 온들 이 병을 어찌하리 아아 내 병이야 이 님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가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데 족족 앉았다가 향 묻은 날개로 님의 옷에 옮으리라 님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내 님 좇으려 하노라.'
◆소쇄원과 식영정
고서면에서 남면으로 넘어가는 길에 담양의 가사문학을 풍부하게 만들었을 누와 정자, 정원과 숲이 잇따라 있다. 대구로 돌아오는 길을 생각해 고속도로에서 가장 먼 소쇄원으로 간다.
소쇄원(瀟灑園)은 담양의 관광지 가운데 가장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기묘사화로 사사(賜死)된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가 세속의 뜻을 버리고 만든 소쇄원은 16세기 이후 호남 사림문화를 이끈 중심지 역할을 했다. 송순, 기대승, 임억령, 김인후, 고경명, 정철, 송시열 등 당대의 학자들이 드나들면서 정치와 학문, 사상을 논하던 구심점이었다. 가사문학 역시 이러한 교류 속에서 살을 찌웠으니 소쇄원의 가치는 보배 중의 보배라 할 만하다.
소쇄원은 전체가 4천500㎡(1천400여평)에 못 미치는 공간에 불과하지만 자연과 인공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솜씨는 건축과 조경 등을 공부하는 이들이 빼놓지 않고 찾아올 수준이다. 북쪽의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담장 밑을 통과해 작은 계곡을 만들며 소쇄원의 중심을 관통하는 배치부터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남아 있는 건물인 광풍각과 제월당, 대봉대가 지어진 과정과 의미에도 이야기가 무성하다.
소쇄원에서 2년을 생활했다는 전고필 광주북구문화원장은 "계류 위에 지은 광풍각의 경우 굴뚝을 하늘이 아닌 계류 쪽으로 낸 것만 봐도 의미심장하다"며 "너무 덥지 않은 선비의 공부방으로 만드는 한편 소쇄원 전체 자연요소 가운데 딱 하나 없는 안개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그는 소쇄원에 담긴 이야기는 하루 종일로도 모자라고, 책 몇 권으로 모자란다고 했다. 인터넷에 자료가 충분하지 않으니 현장에서 문화유산해설사를 찾아 동행하는 게 좋다.
한국가사문학관에서 가사문학을 깊이 새겨보고 정원에서 잠시 쉬었다. 차를 탈 것도 없는 가까운 곳에 식영정(息影亭)이 있다. 꼬불한 계단을 오르니 가슴이 탁 트인다. 멀리 첩첩의 산과 발 아래 광주호가 만들어내는 풍광은 긴 여정이 주는 피로를 단번에 잊게 해 준다. '눈 아래 펼친 경치 철철이 나타나니 듣거니 보거니 날마다 선계(仙界)로다'라고 읊은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이 떠오른다. 한참 경치에 빠졌다가 뒤편으로 가 성산별곡을 읽어본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시는가.'
◆여행 팁
기자가 제시한 '은일한 선비와 가사문학의 길'을 따르면 대구에서 하루로 충분하다. 점심 식사는 죽녹원을 둘러본 뒤 그 앞의 대나무통밥집을 이용하거나 담양읍내에서 해결하는 게 좋다. 이후 코스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한 만큼 식당을 찾기도 만만치 않다. 점심 전에 죽녹원을 나왔다면 가까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과 관방제림을 다녀와도 시간이 충분하다.
저녁 식사는 고서면을 빠져나와 담양IC 가는 길에 있는 곳을 이용하면 된다. 이름난 식당을 가고 싶다면 덕인관(061-381-3991)을 추천한다. 40년이 넘은 이 식당은 2007년 한국을 대표하는 100대 한식당에 선정됐고 2009년 남도음식명가에도 뽑혔다. KBS 1박2일 팀이 다녀갔을 만큼 유명하다. 떡갈비와 대나무통밥이 주 메뉴다. 한우 떡갈비는 1인분 2만5천원, 대나무통밥은 1만1천원으로 가격은 부담스럽다. 4인 가족이 가서 10만원으로는 부족하다. 떡갈비는 구수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독특하지만 먹다 보면 아무래도 동인동 찜갈비가 떠오른다.
글·사진 김재경기자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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