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컬 프런티어] 영남대병원 혈액종양내과 이경희 교수

암과의 싸움, 치료제 임상시험 국내서 손꼽혀

영남대병원 혈액종양내과 이경희(49) 교수는 암(癌)과 싸우는 의사다. 수술을 통해 암 부위를 잘라내는 외과의사도 있지만 이 교수는 약물치료를 통해 암을 다스리려고 한다. 흔히 '항암치료'라고 하면 암 환자에게 적당한 약을 처방해주는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적당한 약'이라는 말은 옳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가령 폐암 환자에게는 A라는 약을, 위암은 B, 대장암은 C를 처방하는 단순한 공식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암은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다. 똑같은 폐암, 위암이라도 환자마다 약에 따른 치료효과가 다르다. 환자에 따라 암치료제 투여량도 달라야하고, 2가지 이상 약재를 섞어 써야 할 경우도 생긴다. 암의 종류는 발생 부위에 따라 쉽게 나눌 수 있겠지만, 치료법은 환자 상태와 암 세포 발생 원인 등에 따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아질 수 있다.

◆꾸준히 연구하는 의사

암 치료는 전투다. 암과 싸우는 현대전에서 창과 방패로는 이길 수 없다. 이기려면 적에 따라 최적의 공략법을 택해야 하고, 첨단 무기도 동원해야 한다. 이 교수는 그 공략법을 누구보다 많이 아는 의사다. 끊임없는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임상시험에 있어 국내에서 손꼽히는 의사다. 임상시험은 세계적 제약회사들이 만든 항암치료제를 실제 환자에게 투여하고 그 효과를 분석하는 것. 임상시험은 아무나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임감과 사명감, 그리고 철저한 분석능력이 필수적이다. 현재 이 교수는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국내 8개 대학병원과 함께 새로 나온 위암 표적치료 항암제의 효과를 임상시험하고 있다.

2007년 세계위암학회에서 최우수 논문 발표상을 받고, 2008년 대한암학회 학술대회에서 췌장암 관련 논문으로 우수상을 받은 것도 이처럼 꾸준한 연구활동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췌장암 논문의 경우, 국내 7개 대학병원과 함께한 임상시험을 바탕으로 한 것. 진행성 췌장암 치료에서 말기 환자들에게 2가지 특정 치료제를 조합해 투약했더니 암세포가 30%나 줄어드는 효과를 봤다는 내용이다.

"물론 모든 췌장암 환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치료법은 아닙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암 치료가 얼마나 쉽겠습니까. 암은 그만큼 복잡하고 까다롭기 때문에 전 세계 의사들이 지금도 밤잠을 설쳐가며 연구에 몰두하겠죠. 하지만 꾸준히 발전하고 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암에 걸리면 모두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암 치료의 개념도 완치가 아닌 조절로 바뀌는 등 변화하고 있습니다."

◆치료를 포기하는 환자가 가장 안타까워

암은 생명과 직결된 질환이다. 그가 혈액종양학을 공부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의사다운 의사', 즉 인간의 생명을 건질 수 있는 의사라면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암과 싸우는 힘든 길을 굳이 택한 것은 사명감 때문이었다.

"제 아버지도 지난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나라 남자 3명 중 한명은 암으로 죽습니다. 그런 무서운 암을 극복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학병원에 있는 그 많은 의사 중에도 환자를 돌보며 기초실험실까지 운영하는 교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이 교수는 대학에 몸 담은 학자이자 의사로로서 보다 나은 치료법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이 교수의 역할은 단지 암 치료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2001년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암 건강교실을 매달 한번씩 열었고, 26일 드디어 100회를 맞았다. 매달 주제도 다르다. 암 자체에 대한 이야기부터 치료과정, 항암제, 식이요법, 심리적 대처 등까지 다양하다. 처음 5년간 혼자서 강의했지만 이후 혈액종양내과 김민경 교수와 번갈아 맡고 있다. 매번 80~200명씩 찾아올 정도다.

가장 안타까울 때를 묻자 그는 환자가 치료를 포기할 때라고 했다. "항암치료는 비용 부담도 크지만 환자가 너무 고통스러워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든 것은 치료 효과가 없을 때입니다. 치료제를 투약한 뒤 암 세포가 줄어들었기를 바라는 환자에게 오히려 커졌다고 말할 때면 자괴감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암은 발생한 순간부터 죽음이란 그림자가 따라붙는 질병이다. 치료가 한계에 부딪히면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교수는 호스피스를 시작했다. "몇달씩 저를 믿고 치료를 받은 환자에게 어느 날 더 이상 치료할 게 없으니 병원에서 떠나라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암성 통증을 환자 혼자 떠안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5년간 노력한 끝에 비로소 지난해 2월 영남대병원 8층 병동에 '완화의료병동'을 갖추게 됐습니다."

◆열심히 치료해 준 의사로 기억되길

그는 몇해 전 만났던 한 환자를 잊을 수 없다. 뼈에 생기는 암인 골육종 때문에 찾아온 한 고등학생. 다행히 첫 치료에서 암 부위만 잘라내고 다리를 살릴 수 있었다. 이후 항암치료도 꾸준히 받았지만 일 년 뒤 폐에서 암이 재발하고 말았다. 1차 항암치료를 받은 뒤 환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다시 일 년이 흘러서 찾아온 환자는 폐의 전이도 심해졌고 심지어 뇌까지 암이 옮겨간 상태였다.

"항암치료도 고통스러웠지만 완치가 힘들다고 생각했던거죠. 아무리 설득해도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퇴원한 지 6개월이 됐는데 과연 살아있을 지 너무 걱정스럽습니다." 폐 전이 이후에도 꾸준히 항암치료를 받았으면 어땠을까? "제가 연세암센터에서 연구강사로 재직하던 시절, 한 의대 학생이 골육종에 걸렸습니다. 이후 폐로 전이된 것도 그 고교생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의대생은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힘들었겠지만 의사를 믿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죠. 그때 의대생은 지금 한 의과대학 교수가 돼 있습니다."

그는 인자한 의사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암 환자는 늘 불안합니다. 비록 결과가 나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환자가 기억하기에 자기 말을 다 들어주고 열심히 치료해준 의사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회진 때에도 가급적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는 작은 감동에도 기뻐한다. 어느 날 한 환자가 "이 교수님만 봐도 병이 낫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는 하루종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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