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덤불 속에서 푸드덕 날아오르는 꿩 때문에, 인기척을 느끼고 스르륵 꼬리를 감추는 뱀 때문에, 길을 막아선 기암절벽의 웅장함 때문에, 그리고 어느새 뒤편으로 훌쩍 사라져버린 내 발자취 때문에 놀란다.
길어귀에 서면, 걸어야 할 길이 멀리 있음에 한숨이 나올 때도 있다. 하기야 세상사가 다 그렇지 않던가. 출발선에 서면 늘 설렘과 두려움이, 목적지에 이르면 안도감과 허탈함이 밀려온다. 반복되는 하루가 그렇고, 일년 365일이 그렇다.
상주에는 MRF(산길, 강길, 들길) 12개 코스가 있다. 상주시청 문화예술담당인 전병순씨가 만든 것. 짧게는 1시간 35분부터 길게는 6시간이 넘는 구간이 있다. 이들 코스 모두 산과 강, 들을 한번에 만날 수 있고,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장점도 지녔다.
오늘 내닫을 길은 그 중 하나인 '장서방길'이다. 출발지 인근 마을 이름이 '장서방'이다. 사람 이름이 아니라 예전에 장승이 서 있어 그렇게 지어졌다. '장승배이'라고 부르던 것이 장서방으로 굳어졌다. 정겨운 이름 덕분에 길 떠나는 설렘도 커졌다.
상주에서 25번 국도를 타고 충북 보은 쪽으로 길을 잡다가 내서면 조금 못미치는 곳에서 901번 지방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빠진다. '성주봉자연휴양림'으로 가는 바로 그 길이다. 5km 남짓 달리면 오늘 길의 출발점인 상주시 내서면 서만2리에 이른다.
901번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바깥장서방'과 '안장서방' 두 마을이 있는데, 안장서방 쪽으로 산을 넘어 이안천을 따라 걷는 길이 오늘 준비돼 있다. 저 멀리 고개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마을 입구에는 움푹 패인 곳에 작은 아이만한 돌기둥이 서 있고, 새끼줄에 무명천을 달아놓았다. 전병순씨는 "마을 동제를 지내는 곳"이라고 했다. 안장서방으로 가는 길 옆 산에도 새끼줄을 쳐 놓았다. 저 멀리 들판 가운데 한창 바쁘게 논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보인다.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에는 노인들만이 남아 땅을 지키고 있다.
몇주 전만 해도 삭풍이 몰아치던 마른 논에는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물이 가득하고, 김매기를 끝낸 밭에는 씨를 뿌릴 채비가 한창이다. 한 걸음이 모여서 수십리 길을 이루 듯,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촌로들의 한 방울 땀이 모여서 산골짜기 들판도 새로운 수확의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마치 마법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길을 찾고 걷는 입장에서 보면, 콘크리트 포장길을 영 마뜩잖다. 장서방길도 그런 인공적인 길을 피할 수 없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소담한 흙길을 찾기는 갈수록 힘들어졌다. 곶감의 고장 상주답게 눈 돌리는 곳 어디에나 감나무가 우뚝 서 있다.
딱딱한 콘크리트 길을 불평하던 중에 둥치에 새파란 이끼가 잔뜩 낀 범상찮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인다. 수령 300년이 넘은 감나무다. 새순이 돋고 열매를 맺고 다시 잎을 떨어뜨리기를 300여 차례. 주위를 둘러보니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선 감나무가 한두 그루가 아니다. 그 뒤편에 주인이 떠난 집 한 채가 있다. 나무는 땅을 지키고, 사람은 땅을 떠난다.
고개를 넘어서자 저 멀리 굽이치는 이안천이 보인다. 속리산 줄기에서 발원한 이안천은 상주 땅을 동과 북으로 가로지르다 영강을 만난 뒤 다시 낙동강과 합류한다. 장서방길은 이안천과 함께하는 길이다. 길을 걷는 내내 이안천의 물소리가 들려온다. 이 길은 눈과 귀가 함께 즐거운 길이다. 갈림길이 나오면 바닥이나 나무에 표시된 푸른색 'MRF' 화살표를 눈여겨 찾아야 한다.
고개를 내려서서 이안천을 따라 아스팔트 길을 잠시 걷다보면 '수회동'이 나온다. 말 그대로 물이 돌아나가는 곳. 포장도로를 그냥 따라가면 재미가 없다. 푸른색 화살표는 길도 제대로 없는 산길을 가르킨다. 조금 가파른 길이지만 오르는데 5분도 채 안 걸린다. 야트막한 언덕인 셈이다. 왼쪽에 이안천이, 오른편에 들판이 있는 오솔길을 따라 10여분쯤 걷다보면 앞서 벗어났던 포장길이 다시 나오고, 그 길에 있는 이안천을 건너는 다리가 바로 노루목교다. 들판에는 사료용 호밀이 한창 키높이를 자랑하고 있고, 인적없던 그곳에 찾아온 낯선 사람에 놀란 백로가 훠이훠이 날개짓을 하며 산 저편으로 날아간다. 노루목교를 지나 다시 아스팔트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무들교가 나온다. 이안천은 오른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름에는 물이 맑아 피서객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무들교를 건너자마자 왼쪽 들판 옆으로 길을 옮긴다. 아직 길이 정비되지 않은 구간이 20여m. 길도 없는 곳을 간다고 불평할 것 없다. 사람 발길을 덜 탄 곳을 찾다보니 새로 길을 내야할 형편이다. 이 곳을 지나면 다시 제방 오솔길이 나온다. 다시 이안천을 옆에 끼고 들판을 감상하며 걷다보면 마지막 다리인 우산교를 만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 우산교를 건너지 말고 바로 도로를 가로질러 산 아래 길로 빠져야 한다. 장서방길 중에서 가장 험한 구간이 시작된다. 높이 2m 남짓한 바위를 오르기 위해 밧줄도 타야 한다. 산길 주변에는 철쭉이 한창이고, 그늘진 곳에는 고사리도 많다. 다만 천변에 쌓인 쓰레기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전병순씨는 "여름철 태풍이나 홍수가 질 때마다 상류에서 떠내려온 쓰레기가 계곡 구석구석에 쌓이는데 일일이 치우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30여분 산길을 타다보면 마치 밀림을 헤쳐가나는 기분이 든다. 길은 하나밖에 없지만 수풀이 우거져 헷갈릴 수도 있기 때문에 곳곳에서 파란색 화살표를 잘 살펴봐야 한다. 산타기에 지쳐갈 즈음, 골짜기에 농사를 짓기 위해 닦아 놓은 농로를 만난다. 옛날 누에를 치기 위해 지어놓은 흙담 집이 바로 곁에 있다. 지금은 흘러간 세월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나무와 풀섶에 둘러쌓여 있지만 한때 이곳에서 누군가 누에를 치며 내일을 꿈꿨을 터이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들판을 가로지르는 3시간 가까운 길이 끝났다. 들판길이 끝나는 곳에는 다시 901번 지방도가 기다린다. 길을 따라 800여m쯤 거슬러가면 원래 출발지였던 '안장서방' 안내표지판이 나온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상주시청 문화관광과 전병순 054)537-7207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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