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는 '새마을의 고향','새마을운동의 종주도(宗主道)''새마을운동의 중흥지'로 불린다. 이 같은 표현처럼 국난극복의 국민적 실천운동인 새마을운동은 경북에서 태동하고 중흥했다.
1970년 4월 22일은 새마을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 이날 열린 한해대책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새마을가꾸기운동'을 처음으로 언급함으로써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새마을운동 하면 떠오르는 곳이 청도 신도마을과 포항 문성마을이다. 박 전 대통령에게 새마을운동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곳이 청도 신도마을이고, 박 전 대통령이 방문해 감명을 받은 곳이 포항 문성마을이다.
◆청도 신도마을
1969년 8월 초 박 전 대통령은 여름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경남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다가 눈이 번쩍 띄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총동원돼 제방복구와 마을 안길을 보수하는 신도마을 주민들의 모습을 차창 너머로 본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기왕 마을을 복구할 바에야 좀 더 잘 가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보자고 마을총회에서 결의하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는 말을 듣고 농민들의 자조· 협동정신을 일깨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뒤 박 전 대통령은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지방장관회의에서 청도 신도마을을 예로 들며 농민의 자조노력을 강하게 호소하며 구상 중인 새마을운동을 처음으로 제창했다.
청도 신도마을은 이미 새마을운동을 1957년부터 시작했다. 이 마을은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농촌환경 개선사업을 시작했다.
청도 신도마을은 일찍이 노는 사람이 없고 술독에 빠진 사람이 없으며 노름하는 사람이 없는 3무 마을로 주민들의 협동심이 유달리 강하고 부지런해 '개미마을'로 불렸다. 새마을운동 훨씬 전인 1957년 신도마을은 귀농한 김봉영씨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지붕개량, 신작로 개설, 마을가꾸기사업 등 잘살기 운동을 추진했다.
주민들은 먼저 길을 넓혀야겠다고 생각하고 당시 마을 뒤쪽 골짜기 뒤실마을과 현재 위치인 새터마을을 잇는 '토끼길' 2.5㎞를 40여일 만에 폭 4m의 농로로 만들었다. 59년에는 부엌개량, 축담개축, 옥내장식 등 가정가꾸기에 주민끼리 선의의 경쟁을 벌였다. 61년에는 부업장려 사업으로 가구당 감묘목 50그루, 복숭아 10그루, 사과 1천그루 이상 갖기 사업을 시작했다. 63년 생활개선구락부가 운영됐고, 1통장 갖기 운동, 새마을금고 육성 등이 이어졌다.
마을 주민들은 "우리 스스로 가꾸어 나간다면 머지않아 잘사는 마을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고 회상했다.
신도마을의 새마을운동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1970년부터 전국의 마을지도자 1천여명이 견학했으며, 2000년대 새마을운동이 세계의 성공모델로 주목받으면서 중국과 베트남, 몽골 등 전 세계국가의 지도자들이 신도마을을 찾고 있다.
청도군은 새마을운동의 변천사를 널리 홍보하고 체험할 수 있는 역사적 체험공간을 조성해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재조명하고 국민정신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을 건립했다.
◆포항 문성마을
포항 문성마을은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생활이 어려워 이농하는 농가가 속출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낙후된 마을을 개발하게 된 것은 1967년부터였다. 이 지역을 휩쓴 극심한 한해로 한 포기의 모도 심지 못하고 있을 때 말라붙은 기계천 하상에서 풍부한 지하수를 발견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주민들은 마을이 살길은 기계천의 물을 끌어올리는 데 있다고 판단해서 12만원을 갹출해 양수기 2대를 구입했다. 제1단계로 양수장을 만들어 16ha의 수리안전답을 조성했다. 힘을 얻은 주민들은 제2단계로 양수시설을 100마력으로 확장해 30ha의 수리안전답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부락민들은 더욱 개발의욕이 고조됐다. 양수장의 물이 미치지 못하는 고지대 천수답 12ha에 뽕밭을 조성, 잠업을 시작해 70년 181동의 누에를 쳐 27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처럼 다각적인 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문성마을의 가구당 평균 소득은 67년 10만4천원에서 70년 23만1천원으로 늘어났다.
단합된 자조활동이 성공을 거두게 되자 마을사람들은 새마을 가꾸기 사업에도 남다른 열의와 노력을 쏟았다.
마을에까지 차가 들어올 수 있는 차도개설에 착수해 도로에서 하천까지 1㎞를 확장·보수했다. 이 사업에서 가장 난관이 됐던 일은 도로부지로 쓰일 토지였다. 주민들이 선뜻 땅을 내놓기를 꺼린 것이다.
하지만 마을 유지인 홍순락씨는 자진해서 자기 소유 문전옥답을 내놓음으로써 다른 사람도 차례로 땅을 희사해 부지문제를 해결했다. 이때부터 비료나 사료를 지게로 운반하던 길이 트럭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바뀌었다. 주민들은 지붕을 개량했으며, 창고를 겸한 마을회관도 건립했다.
1971년 9월에는 박 전 대통령이 전국 시·도지사, 시장·군수를 대동해 마을을 찾아 문성마을과 같은 새마을을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전국에 알려졌다.
청도·노진규기자 jgroh@msnet.co.kr
구미·정창구기자 jungcg@msnet.co.kr
모현철기자 mom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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