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영(46) 방송통신위원회 국제협력관(국장)은 이른바 음치다. 주변에서 참기 힘들어 할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회식 때면 노래하는 것을 즐긴다. '18번'이 국내 록그룹 크라잉넛의 '룩셈부르크'라니, 이쯤 되면 후안무치(厚顔無恥)가 아닐까?
"고등학교 땐 5교시에 자주 노래를 불러야 했어요. 점심 먹고 나면 왜 좀 졸리잖아요. 선생님이 애들 잠 깨라고 저를 시키신 거죠. 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만 망가지는 제 모습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어쩌면 그의 몸에 독립투사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을미사변 직후 경북 북부지역과 만주에서 의병장으로 활약,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장진성씨가 그의 증조부이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그의 처조부 역시 충북 음성 출신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조윤식 씨이다.
"예천 용궁면 고향집에는 힘이 장사이셨던 증조부가 쓰시던 장도(長刀)가 가보처럼 보관돼 있습니다. 제게는 아주 자랑스럽고, 공직의 표상(表象)입니다. 집사람과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란 점에서 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죠."
그는 행정고시 33회에 합격, 1990년 법제처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인생의 항로를 IT분야로 정한 것은 1996년 옛 정보통신부로 옮기면서부터였다. "정보통신 분야 법들을 다루면서 정통부 공무원들과 자연스레 친해졌죠. 인터넷이 막 보급되던 시절이었고, 정보통신이야말로 국가 발전을 이끌 분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상통화 등 3세대 이동통신 활성화, 가입자 정보를 탑재한 SIM(subscriber identity module) 카드 도입, 방송통신발전기본법 제정 등이 기억에 남는 업무입니다."
그는 한때 요구르트를 들고 외판에 나섰던 일도 떠올렸다. 딱 10년 전인 지난 2000년 구미우체국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당시만 해도 각종 사업에 대한 공무원 할당제가 잔존했습니다. 당연히 직원들의 부담이 컸죠. 조금이라도 부하들의 스트레스를 줄여주자는 생각에 틈만 나면 서울로 올라와 알고 지내던 기업을 찾아다니며 구미 특산물을 팔았습니다."
방송통신분야 국제협력 강화 및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 지원을 위해 지난 5월 해외 9개국 방송통신장관회의 및 국내 최대 IT전시회인 '월드 IT 쇼'를 주도한 그는 조만간 활동무대를 중국으로 옮긴다. 최근 주재관 선발시험에 합격, 베이징 주중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하게 된 것.
"중국의 방송통신 시장은 연평균 10% 이상 성장하는 세계 최대 규모입니다. 이 분야에서 글로벌 강국인 우리나라가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놓칠 수 없는 시장이죠. 물론 한·중 FTA도 가시화되고 있고요. 정부간 채널 강화를 통해 실질적 협력이 이뤄지도록 열심히 뛰겠습니다."
그는 고향을 생각할 때면 늘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했다. 연로한 양친이 아직 농사를 짓고 있고, 누나·여동생은 나름대로 효도를 다하고 있지만 중학교 졸업 이후 객지로 나온 자신은 바쁘다는 핑계로 공양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다. "제가 7녀 1남의 외동아들이거든요. 넉넉하진 않았지만 얼마나 보살핌을 많이 받았겠습니까? 이제 또 3년 한국을 떠나야하는데… 걱정입니다." 그의 눈시울이 잠시 붉어졌다.
장 국장은 예천 용궁초교, 용궁중, 대구 능인고, 고려대 법대를 졸업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과 미국 덴버대에서 각각 정책학·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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