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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채우기보다 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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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을 방문한 손님이 수채화로 그린 설경을 유심히 보고 있다. 눈이 쌓인 자리는 비워두고 그 주변을 처리한다고 했더니 신기한 듯 다시 살핀다.

수채화는 물감의 농담으로 화면을 채우기도 하고 적절히 비우기도 한다. 반면에 유화의 제작 방법은 여러 차례 물감을 덧바르며 작품을 완성시켜 나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백한 수채화보다 중후한 맛이 느껴지는 유화를 높이 평가하고 수채화는 유화를 그리기 위한 전단계의 작업쯤으로 가볍게 여기기도 한다. 더러는 수채화의 분위기가 좋아 배워보고자 했지만 어려워 유화를 그린다는 이도 있다. 그는 아마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좀 더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때는 나도 적절한 비우기가 안 되어 아들과 수시로 부딪치며 지낸 적이 있다. 매일같이 컴퓨터에 빠져 새벽녘에야 잠드는 아들 녀석이 무척 문제아로 여겨졌다. 상위권에 들던 성적이 점차 하향 곡선을 그리는데도 미안해하기는커녕 자신보다 뒷자리 아이들을 들먹이며 큰소리로 대들기도 했다. 그럴 때는 자녀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한 부모로서의 허탈감으로 수많은 날을 가슴앓이 해야 했다. 친구들과의 교우관계도 좋고 근본 심성은 착해 나쁜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것을 내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아들의 행동을 매사 못마땅하게 여겼다. 부모가 아닌 제3자의 눈으로 보면 별 문제가 없는, 오히려 숨은 장점을 찾아내면 칭찬해 줄 일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내가 아들을 간섭하고 훈계하는 동안에 아들은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부모에게서 점점 멀어져갔다.

부모는 사랑이라 여긴 것이 지나친 욕심이고 집착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림을 그리면서 깨달았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덧바르기로 색을 채워가는 유화를 그리듯, 내 자식이니 마음에 들어야했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아이가 소화해 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자식들이 어디 부모의 욕심대로 따라오기만 하던가.

내 안의 욕심을 덜어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 마음을 조금씩 비워가니 여백이 드러나는 수채화처럼 마음이 한결 편해지면서 아들도 나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욕심을 비운 자리엔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믿고 격려해 주었더니 오히려 의젓해지고 자기의 일을 스스로 찾아내기 시작했다. 비우기는 소멸이 아니라 생성을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나 손아귀에 넣은 것은 내보내기가 쉽지 않듯 채우기에 급급한 삶을 살아가다 보니 가까운 것은 보아도 멀리는 내다보지 못했다. 항상 꿈을 크게 가져라 말하면서도 막상 꿈꿀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은 오늘날 부모들의 모순점인 듯하다.

지금 아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삶의 현장에서 지혜를 배우고자 멀리 이국땅으로 떠났지만 믿음이 있기에 든든하게 지켜볼 뿐이다.

화가 노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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