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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원태의 시와 함께(60)] 공허의 근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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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의 근육 - 김재훈

삼월에 고백했는데 지금은 구월, 서사도 없이 시간은 흘러서

이름 붙이지 못한 구름들이 이리저리 흩어진다

수년간 방치된 흉가가 드디어 무너졌을 때는 장마가 지나고

매미 울고 뜨거운 여름도 지난 뒤라고

어쩌다 마른 잎사귀를 밟았지만 다시 보면 죽은 매미였다

무너진 집은 무너지기 위해 얼마나 오래 허공을 뒤틀었을까

그늘과 함께 주저앉아버리는 모든 통증의 끔찍함에 대하여 잠시,

나는 생맥주를 마시고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는다

정말 그래 매미라는 풍선, 잔뜩 부풀어오른 여고생들은

한꺼번에 울어버리고 울어버린 만큼 떡볶이를 먹지

몸 아픈 구름들이 이빨을 떠는 저녁 지상의 모든 그림자가

치통처럼 부풀어오른다 피가 고인 입술에 입맞춰주겠니

저기 풍선이 하나 날아간다 울음이 울음 속에 스미듯이

허공으로 작고 빨간 허공 하나가 아랫입술을 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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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마음에 드는 시인이 등장했다. 《문학동네》가을호에 등단작을 발표한 김재훈 시인은 '공허'에서 '근육'을 본다는 점이 우선 맘에 든다. 그는 삼월에 고백을 하고, 구월까지 묵묵히 '서사도 없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데, 그것도 물론 맘에 든다.

그는 "그늘과 함께 주저앉아버리는 모든 통증의 끔찍함에 대하여 잠시" 언급하려다말고, 대신 이내 '맥주 마신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는' '에두름'을 체득하고 있는 듯해서 또 맘에 든다. 그리고 매미와 풍선, 여고생과 떡볶이의 두루뭉술하고 비까번쩍한 '연쇄반응'이 환기하는 이미저리의 화학적 '몸바뀜'(轉性)도 시의 비의라는 걸 알고 있다. 그것 역시 더 맘에 든다.

내 맘에 거듭 들었다고 해서, '좋은 시인'이 다 되는 건 물론 아니다. 가령 그가 "몸 아픈 구름들이 이빨을 떠는 저녁"과 같은 섬세한 감각을 놓쳤더라면 말이다. 이 한 구절이 그의 좋은 점을 진짜 좋은 점이 되게 해주는 보증서 같은 것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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