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디딤돌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이름 석 자 겨우 쓸 무렵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붓글씨를 가르쳤다. 그 시간만큼은 호랑이 훈장처럼 아주 엄하셔서 '진짜 아버지 맞나?'며 속으로는 의심도 했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학교에 가서도 다른 아이들보다 글씨 예쁘게 잘 쓴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요즘에는 컴퓨터 키보드만 두드리면 원하는 글자체와 글자 크기, 색깔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땐 손수 쓰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가끔 선생님께서 내 공책을 펼쳐 들고는 "이 친구 쓴 것 좀 봐? 너희들도 이렇게 예쁘게 쓰도록 하자"라고 하셔서 머쓱해지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만으로 연애편지를 대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공부는 좀 뒤떨어지던 우리 반의 P는 이틀에 한 번씩 대필을 부탁해 왔다. 그런 입장이 미안했던지 채 익지도 않은 풋과일을 가져와 다른 아이들 몰래 내 책가방에 넣어 주곤 했다. 시험 공부를 해야 할 때도 그 아이는 대필을 부탁해 왔고 한 술 더 떠서 아예 처음과 끝부분의 마무리를 내가 알아서 쓰라고 했다. 특별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고 슬슬 짜증이 났다. 처음엔 내가 생각나는 대로 쓰다가 언제부턴지는 모르지만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시집 몇 권을 뒤적이며 예쁜 문장들을 뽑아와서 패러디하기 시작했다. '우리 만나 기분 좋은 날은 강변을 거닐어도 좋고 돌담길을 걸어도 좋고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어도 좋았어. 이세상이 온통 우리를 위하여 축제라도 열어 놓은 듯 했지. 하늘엔 폭죽을 쏘아 놓은 듯 별빛이 가득하고 불어오는 바람도 우리들을 위한 사랑의 사인 같았어. 우리는 무슨 말을 해도 웃고 또 웃기만 했지. 모든 꽃은 시들지만 내 마음 속에 핀 너에 대한 사랑의 꽃은 천 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아.'

생각해보면 귀찮고 부담스러워서 싫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아이로서는 '해가 뜨는 것도 달이 뜨는 것도 그 남자친구 때문'이라고 생각할 만큼 대단한 존재였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써 주곤 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며 허황한 이야기를 써댔지만 그 아이는 내 마음도 모른 채 뛸 듯이 좋아했다.

시험 공부를 미뤄 둔 채 남의 연애편지 대필해 주며 허덕인 시간들이 세월이 흐른 지금에 생각해 보니 나의 글쓰기에 든든한 디딤돌이 된 것 같다. '돌에 걸려 넘어지면 걸림돌이 되지만 그 돌을 딛고 일어서면 디딤돌이 된다'는 말처럼 마구 써준 그때 그 편지가 P에게는 걸림돌이었는지 디딤돌이었는지….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이 몰려온다.

서하<시인>

최신 기사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은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하며 대구의 '첫 여성 단체장'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대구의 경제적 문제를 해...
이달 원/달러 환율이 1,470원을 넘어서며 1998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가운데, 중동 전쟁의 여파로 원화가치가 급락하고 있어 1,500...
경기 남양주에서 20대 여성을 살해한 40대 남성 A씨가 의식 불명 상태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이 지연되고 있으며, A씨는 범행 후 전자발찌...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 폭격으로 중동 전쟁이 발발한 가운데,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살해하겠다고 공언했으..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