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우승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고 우승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지난달 이름조차 외우기 힘든(?) 중남미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열린 2010년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U-17) 여자월드컵에서 전 세계가 한국 여자축구의 승리에 깜짝 놀랐다. 언론이나 축구계에서조차 '여자축구 불모지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 대회 우승 주역인 포항여자전자고의 김민아(2년), 김아름(3년), 오다혜(2년) 선수에게 이런 반응은 오히려 의외였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세계를 향한 거침없는 도전 욕구, 톡톡 튀는 개성으로 중무장한 당찬 여고생들에게 우승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다. 17살 동갑내기인 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축구공을 닮았다. 설움과 고통을 꾸역꾸역 삼키며 운동해왔던 이전 세대와 달랐다. 축구도 공부도 한바탕 놀이하듯 즐긴다. 얼핏 철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이런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6일 전국체전이 열리고 있는 경남 함안 공설 운동장. 여자 축구선수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이들 중에는 한국 축구사상 처음으로 FIFA 주최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한국 U-17팀 주역들인 포항여자전자고 소속 김민아, 김아름, 오다혜 선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우승의 기쁨도 잠시, 지난달 28일 귀국하자마자 1일 포항시에서 주최한 환영행사를 끝으로 곧장 이날 개막한 전국체전에 참가하기 위해 훈련에 돌입한 것이다. 사전 인터뷰 약속을 하고 오긴 했지만 막상 만나긴 쉽지 않았다. 시합(7일)을 하루 앞두고 훈련과 상대팀 전력 분석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터였다. 행여 다음날 펼쳐지는 경기에 영향을 줄까봐 인터뷰 내내 조심스러웠다.
◆'세계를 호령한 여전사' vs '천진난만한 앳된 소녀'
전 세계 여자축구계를 제패한 국가대표 선수답지 않게 맑고 천진난만한 모습의 앳된 소녀들이었다. 낙엽 굴러가는 소리에도 웃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시합을 하루 앞두고 있지만 세계를 제패한 선수답게 전혀 긴장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터뷰 중 새끼 손가락에 투명 매니큐어를 칠하고 한껏 멋을 부리는 모습들이 한창 외모에 신경을 쓰는 영락없는 10대 소녀였다.
"데이비드 베컴 실제로 보니까 너무 멋있었어. 아니야 청와대에서 만난 샤이니가 완전 '짱'이야, 정말 안기고 싶을 정도였어. ㅋㅋ" 인터뷰 간간이 한·일 결승전 시작 전 만난 영국의 축구스타 베컴의 외모와 청와대 초청에서 만난 인기스타의 외모를 비교하며 웃음을 터트릴 때는 그라운드를 누비며 눈물을 참고 달렸던 열정적인 소녀들의 모습은 잠시 뒤쪽에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화제가 축구 이야기로 바뀌면 눈을 반짝이며 '진지 모드'로 급변한다. 힘주어 말을 이어가는 목소리는 당돌하기까지 하다. 아직도 앳된 소녀의 목소리였지만 생각은 어른스러웠다. 특히 하루 종일 그라운드를 뛰어도 힘겹지 않고 경기 자체를 즐길 수 있다는 여유와 축구에 대한 열정은 프로선수 못지않았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아직도 화제가 되고 있는 결승전인 대일본전으로 이어졌다. 세 선수 모두 '운이 좀 따라주었다'는 일부 평가에 대해 그렇게 억울할 수 없단다. 대표팀 주장을 맡았던 김아름 선수는 "일본과의 결승전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모든 선수들이 독기를 품었어요. 감독님이 싸우고 나오라고 할 정도였어요. 열심히 뛰는 일본선수를 보고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겨야 한다고 경기 내내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고 했다. 이번 대회 내내 부상투혼을 펼친 골키퍼 김민아 선수는 "한·일전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오히려 떨리지 않았고 왠지 모르게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하나 정도는 막자고 생각했지만 막지 못해 아쉬웠다. 그러나 상대선수들이 알아서 밖으로 차줘서 고마웠다"고 활짝 웃었다. 결승전에 뛰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는 오다혜 선수는 "우리 선수들이 원래 두려움이 없었다. 맘먹은 대로 하고 경기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결국 해낼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러나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경기 내내 기도를 하며 지켜봤다"며 조마조마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일과 놀이를 구분하지 않고 즐기며 어디서나 당당한 G세대답게 세계무대를 대하는 눈도 달랐다.
비교적 단신(165㎝)인 김아름 선수는 "서양아이들이 머리통 하나 더 크다고 무시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스피드나 힘에서 자신있었기에 키 큰 외국인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면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세 선수 중 가장 키가 큰(172㎝) 오다혜 선수는 "키 큰 외국선수들이 지나갈 때면 우리 선수들이 주눅들기보다 오히려 '누가 키가 큰지' 내기를 하는 등 키가 작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이들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경기 날짜가 잡히면 새벽부터 하루 종일 이어지는 가혹한 훈련과 기숙사생활, 각종 대회 준비로 일 년에 한두 달 정도밖에 집에 갈 수 없는 생활은 아무리 축구를 사랑하는 선수들이지만 견뎌내기가 힘들다. 이번 대회를 통해 대표팀을 이끌 차세대 골키퍼로 주목받고 있는 김민아 선수는 자칫하면 이번 대회에 참석조차 하지 못할 뻔했다. "지난해 훈련이 너무 힘들어 축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어요. 하지만 축구가 좋아 마음을 다잡고 참고 노력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만 뒀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아찔해진단다.
어린 나이에 세계를 제패했다고들 하지만 이들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김아름 선수는 "19세, 20세 연령별 국가대표를 차근차근 밟아 나가서 성인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싶다"고 했고, 오다해 선수는 "세계 대회에 나갈 때마다 외국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지만 일단 말이 안 통해서 답답했다. 앞으로 영어나 중국어 등 외국어 공부를 해 기회가 되면 해외유학을 가서 더 넓은 세계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반짝 관심보다 지속적인 지원, '부탁해요'
세 선수는 월드컵 우승 후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승리를 맘껏 만끽하고 있다.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조명을 당당하게 즐길 줄 아는 거침없고 발랄한 10대 소녀답게 인터넷 검색어에 자신들의 이름이 실시간으로 오를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단다. 김민아 선수는 "인터넷 검색어란에 내 이름을 치면 소개하는 내용이 올라와 기분이 좋아요. 연예인처럼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귀여운 외모의 오다혜 선수는 최근 팬클럽까지 생겼단다. "월드컵 우승 후 미니홈피 방문자가 700명 가까이 늘기도 했어요. 요즘은 학교까지 찾아오겠다는 남학생 때문에 골치가 아파요."
축구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자축구계의 스타가 됐지만 이들에게도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다. '여자 축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일 년 후에도 이어질 수 있을까' '기량을 마음껏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혹시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국내 여자축구 현실에 대한 우려다. 이들이 이러한 우려를 실제 현실로 경험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일 포항에서 열린 환영행사가 끝이 나자마자 포항시내 곳곳에 내걸렸던 플래카드가 곧바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여자축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나 걱정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이들은 열심히 노력하고 타인의 시선에 대해서도 '쿨'하게 받아 들이는 신세대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란다. '너무 많은 관심이 부담이었다'는 김아름 선수는 "처음 받아 보는 관심이 부담스러웠고 자만할 수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됐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다"고 담담해했다.
세 선수는 우리 사회의 반짝 관심보다 여자축구에 대한 '하트'(사랑)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우리가 세계무대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친딸처럼 아껴준 국민들의 관심과 박수가 있었기 때문이죠. 앞으로도 친딸처럼 여자축구를 지켜주세요." 포항여자전자고 축구부는 이번 전국체전에 경북대표로 출전해 또 다른 우승 신화에 도전하고 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 성일권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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