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나와 어울린다는 것

나의 애마 아반떼가 세상에 나온 지 꼭 10년이 되었다. 녀석은 큰 사고 한번 일으키지 않고 묵묵히 나를 따라와 준 고마운 친구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다면 씽씽 달려 바다 앞에 가 몇 시간이고 함께 있어 주었고 삶의 길목마다 동행하며 지치지 않는 발이 되어주었다. 내겐 더할 수 없이 괜찮은 녀석이 주위 사람들에겐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때가 있다. 명색이 의사인데 좀 어울리는 차를 타면 안 되겠는가 하는 말을 가끔 듣는다. 하기야 10년을 내리 굴렀으니 입성이 변변찮기는 하다. 여기저기 긁힌 자국에다 움푹 파인 옆구리에 칠 벗겨진 이마까지, 아닌 게 아니라 영락없는 고물이다. 하지만 속은 아직 팔팔한 녀석이다. 언제든 내가 가자면 남도든 북쪽 끝이든 어디로든 거뜬하게 데려다준다. 십 년을 함께하면서 기계치인 나도 녀석을 이해하게 되었고 녀석도 제법 나를 이해하는 눈치다. 오랜 친구 같은 녀석이 좀 늙은 티가 난다고 면박을 받는 것까진 그래도 괜찮다. 직업적, 사회적 위치에 어울리게 좀 더 격이 높은 차로 바꾸라는 조언을 종종 듣는데 나는 아직도 이 말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수긍은 하지만 깊은 이해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단언하건대 녀석은 지금까지 나와 가장 잘 어울렸다.

그 사람이 가진 입지에 어울리는 특정 브랜드 같은 건 없다. 어떤 직업이나 사회적 위치에 어울리는 옷이나 신발, 가방이나 자동차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때와 장소 같은 상황과 개인의 취향, 부수적으로 그 사람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어울린다는 것만큼 가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있겠는가. 나를 정말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가진 물건의 상대적 낙후성에 대하여 지적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에게 어울리는 표정과 말투와 웃음소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격려하고 칭찬해준다. 길거리 옷을 입어도 몇 만원짜리 가방을 둘러도 어떤 신발을 신어도 특별히 따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내게 정말로 잘 어울리는지 본다. 어울린다는 말은 그런 것이다. 웃을 때 예뻐지는 눈이 내게 어울린다고 말해주는 것, 책을 읽거나 땀 흘리며 운동을 하거나 생각에 골똘해 있을 때 근사해 보인다고 말해주는 것, 그런 말을 들을 때 기분 좋아지는 것이다. 투박하고 못생긴 손이지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손이라고 잡아주는 것이다.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일이다.

좀 불량해 보이긴 하지만, 보기에 새뜻하지도 않지만 나는 녀석이 여전히 좋다. 주차장 한 구석에서 며칠이고 꿈쩍도 않다가 내 손이 닿으면 스르륵 움직여주는 흠집투성이 녀석이 좋다. 가끔 불량이 나기도 하고 보기에 산뜻한 나이도 훌쩍 지난 아줌마와 썩 잘 어울리는 녀석이 나는 좋다.

원태경<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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