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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원태의 시와 함께] 요강(김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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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시장에서 운 좋게 얻어온 항아리

그 속엔 아주 오래된 강물 하나 살고 있는지

밤이면, 오래도록 잘 젖은 물소리들 걸어 나오곤 한다

그런 날이면

내 몸 안에서 서서히 고개 드는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곤 했고

강물에 빠지거나 물을 엎지르곤 하는 눅눅한 꿈들에

나는 밤새 젖는 것이다

건너온 세월만큼이나 오래 묵은 이야기들로

거실 한켠을 지키고 있는 낡은 요강 하나

저 입구를 수없이 들렀다 갔을 이름 모를 불면들과

우리들의 배고픔을 수선하던 어머니의 오랜 뒤척임과

잔털이 돋기 시작한 오빠의 은밀한 성장들

그리고 언제부턴가, 요실금 같은 기억만 믿기 시작한

할머니의 슬픈 꽃잎까지도 요강은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 밤, 밖에는 영하의 바람이 불었고

가끔은 겨울도,

그 안에다 육각형의 살얼음을 배설하곤 떠나갔다

이젠 요강도 민속박물관에서나 보게 되었다. 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끓이고 보시기 하나 가득 물김치를 담아 온 식구가 숟가락을 담그며 떠먹는 것이 우리의 문화이듯, 밤에는 역시나 요강 하나에 온 식구가 오줌을 누며 살아왔다. 작은 사기 항아리에 온 가족이 공용으로 배설을 하는 것은 수세식 서양문화에 비추어보면 좀 비위생적으로 느껴지지만, 바꿔 생각하면 그때가 가정의 결속력이 가장 강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눅눅한 나의 꿈자리와, 어머니의 오랜 뒤척임과, 오빠의 은밀한 성장과, 할머니의 요실금까지 낱낱이 기억하는 강'으로 요강만한 강이 또 어디 있으랴. '영하의 바람과 육각형 살얼음'의 그 추우면서도 끈끈했던 결속의 시절일랑은 이제 세월의 강 너머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하자. 그리고 귀한 골동품이 된 "운 좋게 얻어온 항아리"를 잘 씻어서는 국화 한 다발을 꽂아 거실 한구석을 장식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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