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연평도와 전쟁

연평도 기습 포격 뉴스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 무서운 소식은 우리를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한다. 휴전협정 이후 민간인 거주 지역까지 무차별 포격을 가한 것은 처음이다. 폐허가 된 마을의 처참한 모양과 꽃다운 나이에 숨져간 두 해병과 연평도 주민들의 죽음을 보고 북한의 무도한 도발에 대한 분노가 치민다. 북한의 3대 세습은 사회주의 어느 국가에서도 보지 못한 일이다.

젊은 김정은은 김일성을 빼닮았다. 몸무게와 머리 모양까지 비슷해 희대의 독재자를 연상케 한다. 연평도 도발은 북한의 비정상적인 권력 승계에 반발하는 민심을 잠재우고 내부적 결속을 다지려는 음모가 깔렸다고 한다. 그런데도 일부 북한을 찬양하는 친북 인사들에게 묻고 싶다. 눈부신 경제발전과 자유화, 민주화를 성취한 우리나라에 비해 북한은 무엇을 이룩하였느냐고. 평화로운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폐허로 만든 그들이 아닌가. 건물과 집이 불에 타고, 산이 불타고 화염에 휩싸인 연평도를 보며 내가 겪은 6'25전쟁이 생각난다.

기억의 저편에서 서서히 돋아오는 아픔이 있다. 그것은 전쟁의 의미조차 모르던 어린 시절의 한 때에 혹독한 고생으로 얼룩진 6'25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때 내 나이 여섯 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다. 전쟁이 났다면서 이웃들은 모두 대구를 떠나고 있었다. 우리 가족도 미숫가루와 간단한 짐만 챙겨 피란을 갔다. 우리 식구들이 간 곳은 먼 친척들이 사는 달성 화원 건너 상곡마을이었다.

그러나 그곳도 피란지가 되지 못했다. 잠잠했다가도 밤이 되면 북한 괴뢰군이 나타나 남자들을 끌고 갔다. 약탈한 양곡과 탄알을 나르는 데 동원된 것이다. 젊은 여자들도 마구 끌려갔다. 밥을 짓는데 노력 동원을 한다고 했다. 며칠 후 우리는 다시 대구로 돌아가기 위해 화원의 백사장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보퉁이를 이고 이불을 짊어진 사람, 아이를 목에 태운 사람, 사람의 물결 속에 나룻배는 사람을 실어날랐다. 나룻배가 한 번 올 때마다 서로 먼저 나룻배에 오르려고 아우성이었다.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다 같이 죽는다고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가 고함을 질렀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나룻배 타는 데 어린 아이와 노인은 제외되었다. 아무리 악랄한 괴뢰군이라도 노약자를 괴롭히기야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연로하신 외할머니와 어린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남겨지게 되었다. 쌕쌕이 소리가 무섭게 지나가고 있었다. 쿵쿵 땅을 흔들어 대는 대포 소리, 폭격 맞은 집이 불타며 피어오르던 자욱한 연기, 전쟁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외할머니와 어린 나는 더 깊은 산골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구불구불한 논과 밭 사이를 진종일 걸을 때도 있었다. 발에 물집이 생기고 볕은 뜨거웠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간신히 허기를 참으며 외할머니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걸었다. 한참 지나서 앞서가던 아주머니가 유탄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냥 울었다. 숨이 멎기 직전의 그 처절한 절규를 보며 무서움에 질려 배고픔도 잊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친척이 있는 마을이긴 했으나 인심이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쟁은 가난과 끝없는 파괴를 요구할 뿐이었다. 날마다 먹는 것이라곤 꽁보리밥 한 덩이에 구더기가 굼실거리는 된장 한 술뿐이었다. 얼른 꽁보리밥을 먹고 산으로 올라가서 나무를 해오던 그때, 꽁보리밥이 너무 먹기 싫어 먹지 않겠다고 버티던 날, 외할머니는 소리 없이 우셨다. 수건으로 눈시울을 닦으시던 외할머니. 그때의 눈물의 의미를 이즈음에야 조금은 알 것 같다. 가난과 폐허 속에 겪었던 유년의 기억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 더구나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은 더욱 그렇다. 누구나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전쟁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은 겪어 본 사람이 아니고는 알 수 없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더 많은 현실이다. 참혹한 전쟁의 실상을 알려야 하는 것이 기성세대에게 지워진 무거운 책무가 아닐까. 그것이 우리가 평화를 찾는 길이기도 하다.

허정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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