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여자 중학교에 난입한 4인조 연쇄살인마들이 학생들과 교사를 무참하게 살해한다. 그들은 반장 여학생을 납치하고 검문을 피해 산속으로 달아난다. 인적 없는 야산 숲속에서 살인마들은 공포와 절망에 빠진 반장 소녀를 상대로 '한바탕 장난'(제2의 범죄)을 저지르려는 중이다. 그 순간 한 노인이 나타난다.
평범해 보이는 노인은 괴력을 발휘해 살인마들을 물리치고(모두 죽여 버리고) 소녀를 구출하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만화 같은 이야기지만, 문체가 매혹적이고 품격이 있기에 만화처럼 가볍게 읽히지 않는다.)
만화 같은 사건, 영화 같은 장면에 의문을 가진 베테랑 여기자가 노인의 뒤를 캐기 시작한다.
'대체 저 노인은 누구인가?'
미국의 비밀정보조직 역시 노인의 정체를 간파(한때 자신들이 개발하려고 했던 비밀 병기쯤으로 해두자)하고 노인을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면서, 노인은 다시 한 번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한편 베트남 전쟁 당시 태어난 라이따이한 청년은 얼굴 한 번 마주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찾아 한국으로 온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노인의 괴력이 발현된 원인과 그로 인해 발생한 죄책감의 기원을 탐색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노인은 1962년 대한민국 군인으로 미국의 네바다 사막에서 모래폭풍을 맞고, 두 번의 거대한 전쟁을 거치면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폭력성을 체득한다.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각혈을 통해 폭력성은 더욱 강력해지고, 그것은 결국 자신을 가장 깊고 내밀한 고통으로 밀어 넣는다.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살해해야 했던 그는 노년에 다시 맞은 구원의 기회에 이전과 달리 타인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전쟁을 숨가쁘게 벌여간다.
"살아남는 게 중요해."
노인은 자신이 구출한 여학생에게 '어쨌든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네 나이에는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사람을 죽이는 괴물이 되어 살아남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고통스러워 한다.
'미친 듯한 속도감'이라는 표현이 이 소설에 어울린다. 눈길을 잡아당기는 사건으로 소설은 시작되고, 책장은 쉴새없이 넘어간다. 익숙한 문법의 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워낙 '신선한 탓'에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 없는 '작가만의 막무가내' 소설도 아니다.
소설 '에이전트 오렌지'는 괴력의 초능력자들이 벌이는 사투를 통해 폭력의 역사를 관통하며 끝끝내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구원 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빠른 진행, 위트 넘치는 문장과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로 소설은 마치 한편의 흥미로운 영화를 보는 듯하다.
지은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폭력성과 괴력을 획득하게 되는 노인의 삶과 사투를 통해 개인을 압도하는 거대한 폭력의 연대기를 추적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전쟁과 살인, 차별과 실의, 배반과 고통 등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다종다양한 폭력의 위협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작품 전반에 걸쳐 타의에 의해 괴물이 되고, 괴물이 되어 죄책감에 짓눌리고, 다시 새로운 폭력에 노출되고, 그런 폭력이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폭력의 악순환도 목격할 수 있다.
전작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으로 속도감 있는 전개와 개성 넘치는 필력을 선보였던 지은이는 자칫 무겁고 음습할 수 있는 주제를 과장과 위트 넘치는 묘사들을 가미해 유쾌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지은이 구현은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작가가 아니다. 그는 누군가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등단했으며(장편소설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 발표로 등단), 전통적인 소설창작 문법이나 평론가를 위한 담론에 머물지 않는다.
구현은 "왜 내가 그들로부터 배워야 하는가? 그들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 무엇인가"에서 출발해 자기만의 문학적 성채를 쌓아가고 있다. 근래 한국 문학의 지루함에 넌더리가 나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318쪽, 1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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