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가 출범한 직후였다. 국책연구원장으로서 이듬해에 수행할 연구 주제들에 관해 논의하던 중이었다. '작은 정부' 시대에 그러나 우리 사회에 여전히 산적해 있는 공공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이른바 '새로운 거버넌스'(new governance)의 활성화 방안을 연구 주제에 포함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런데 박사급 연구원 한 사람이 조심스레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이번 정부는 거버넌스니 사회적 자본이니 하는 개념을 선호하지 않는다더라"라는 것이 이유였다.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버넌스로 말하자면 선진 OECD 회원국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적용하고 있는 21세기형 국정 관리 모형이 아닌가. UN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기구들의 권장에 따라 개발도상국들도 앞다퉈 가며 도입을 꾀하고 있는 정부 개혁 모형이 아닌가. 지난 십여 년간 정부학 분야의 세계적인 학회들의 세미나에서 거버넌스라는 단어가 빠지면 토론이 안 될 정도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현 정부는 대체 어떤 국정 관리 모형을 지향한다는 것인가?
그후 평소 알고 지내던 교수 출신 공직자들을 만나는 기회가 있어 이 궁금증에 대해 문의해 보았다. 그 분들은 정색을 하면서, 전혀 터무니없는 음해성 이야기들이 돌아다니나 보다고 오히려 걱정스러워했다. 그렇기는 해도, 현 정부가 거버넌스 방식의 국정 관리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반인들의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오해'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 궁금증은 거버넌스의 필수 요건 가운데 하나인 비정부기구(NGO)들의 한국적 특성을 이해하면 풀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현 정부가 호감을 갖지 않는 것은 국정관리 방식으로서의 거버넌스 개념 자체가 아니라, 그 요소 가운데 일부인 비정부기구들에 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정파성(partisanship)을 지닌 일부 시민단체들에 대한 비호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만일에 어떤 비정부기구 혹은 시민단체가 정파성을 지니고 활동한다면,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여 집권정부에 비우호적인 정파성이나 이념적 성향을 지니고 활동하는 경우라면, 집권정부로서도 그 단체에 대해 비우호적인 자세를 취하게 될 것임을 납득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1987년의 민주주의 이행 이후 모두 5차례의 정권 교체가 있었다. 이 시기에 시민단체들이 문자 그대로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정파성을 지닌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모두 있을 것이다. 정권 교체가 있을 때마다, 정파성을 지닌 시민단체들은 집권정부와의 친소관계에 따라 부침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신(新)관변단체'가 되거나 혹은 '신반정부단체'가 되거나 했다. 사반세기 가까이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시민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진 지금, 이제는 시민사회 공동체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해 볼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우선, 어떤 특정 정치집단과 직접 연계되어 있거나 지향하는 이념적 가치 면에서 간접적으로라도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민단체들은 그 정치집단이 집권하는 경우에 국정에 직접 참여하거나 간접적으로라도 집권정부가 성공하게끔 내놓고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에 그 정치집단이 실각하는 경우에는 공동의 책임을 지고 하야(下野)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새로이 들어선 정부가 자신들을 차별대우한다는 식의 불평은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민단체들이나 싱크탱크들의 활동 방식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식에 의해 다양한 사회집단들의 선호를 정책에 경쟁적으로 반영함으로써 정책 아이디어의 다원화를 기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진정으로 탈(脫)정파적인 시민단체들의 발전과 역할도 기대해 봄직하다. 여기서 '탈정파적'이란 말은 특정 정치집단과의 직간접적인 연계 없이 불편부당하다는 소극적 의미에 더하여, 전체 공동체의 이익, 즉 공동선의 본질을 모색하고 실천하려는 적극적인 의미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이익집단들은 물론이고 특정의 정파적 특성이나 이념을 지향하는 시민단체들에 의해 공공갈등이 발생하는 경우에 이를 공익의 시각에서 고민하고 중재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시민이나 단체들이 일차적으로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정용덕(서울대 교수 행정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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