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행복칼럼] 대기업

지금까지 나는 대기업이 하는 일에 감동받은 적이 별로 없다. 설령 그들이 많은 외화를 벌어 외환 보유고를 높였다거나 혹은 세금을 많이 내 국고를 풍성하게 했더라도 이익 추구의 결과이지 결코 애국애족을 위함이 아니라는 이유다. 유럽 여러 나라에 삼성 로고가 보이고 미국에 현대자동차가 굴러 다녀도 흐뭇하고 기분이 좋을 따름이지 감동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 리비아 사태에서 대우건설과 현대건설이 한 행동은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3월 2일 오후 1시40분 리비아의 미스라타 항구에 대우건설이 빌린 그리스 배(니소스 로도스호)가 입항했다. 건설현장 근로자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이 배에 탄 근로자들은 한국인은 55명뿐이었고, 나머지 444명은 인도, 이집트, 말레이시아 등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간, 리비아의 트리폴리와 벵가지에도 대우에서 빌린 여객선 두 척이 입항했다. 이 3척의 배로 피난시킬 근로자는 모두 2천772명인데 그 가운데 한국인은 164명이라고 한다. 일단 그리스의 피레에프스 항구로 간 뒤 각자의 고향으로 비행기나 배로 보내준다는 것. 소요 경비는 60억원이 넘는단다. 대우건설 서종욱 사장은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근로자들의 안전이 우선"이라고 말했단다.

한편 현대건설도 비슷한 시기에 여객선 2척을 빌려 근로자 730명(한국인 94명)을 리비아 수르테에서 몰타까지 대피시키고 있다고 한다. 현대건설의 김중겸 사장은 "제3국인든 한국인이든 모두 동료"라며 "생사를 같이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두 사장들은 오랜만에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언제 연락이 닿으면 꼭 쓴 소주 한잔을 대접해주고 싶다.

역사는 돌고 도는 모양이다. 분쟁지에서 외국 근로자들을 피난시켜 준 예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신문 기사 말미에 이런 내용도 함께 실렸다. 2003년 미국·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SK건설이 전세기를 동원해서 현장 근로자 모두를 3국으로 대피시킨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 때 감명 받은 외국 출신 근로자들은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로 복귀해서 공사를 제때 마치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지난해 해외 건설업체는 반도체, 자동차보다 많은 715억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리비아에서 피난 배를 탄 이집트 근로자 무함마드는 "회사(대우)가 우리까지 챙겨줄 줄은 몰랐다. 한국건설이 강국 지위에 그냥 오른 것이 아니다"고 눈물을 흐리며 고마워했다는 것이다. 나 역시 한국 대기업이 인간에게 이런 신의와 애정을 갖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본다더니 돈에 목적을 두고 사업하는 사람들이 수십억원을 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진정한 인류애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랜만에 행복을 느낄 수가 있었다. 먼저 대기업의 한 일에서 감격했고, 이런 기사를 발굴해 우리에게 알려준 신문기자들에도 고마움을 느낀다.

권영재 대구의료원 신경정신과 과장·서구정신보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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