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서울 인사동. 지하철 안국역 6번 출구를 나오니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지역 출신 화가들이 모여 그룹전을 열고 있다는 갤러리 '고도'를 향했다. 큰 유리창을 통해 비 내리는 인사동을 감상할 수 있는 그곳에 들어서니 듣기 편한 구수한 방언이 인사를 건넸다. "오니라 고싱했어여…."
제로회(ZERO會). 1969년 12월 경북 김천 출신의 미술학도 7명이 뜻을 모아 창립한 예술가의 모임. 처음부터 시작하자는 의미로 '제로회'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후 지금까지 43회째 그룹전을 연 제로회는 회원 수를 수백 명으로 늘리면서 그동안 2천 점에 가까운 작품을 제로회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
제로회 1기 멤버인 한국화가 김호창 씨. "전국에 흩어진 지역 출신 미술학도들이 방학을 맞으면 고향으로 와 작품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출발했어요. 당시 김천은 교통의 중심지였지만 문화의 향기는 전혀 없는 시골에 불과했는데 그때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요. 미술학도는 전시회로, 음악학도는 향음회로 문화운동을 일으키던 그때의 초심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어요."
42년이나 모임이 이어지면서 재미있는 풍경도 종종 펼쳐진다. 자신을 지도해 주시던 미술 선생님, 미술학원 원장님과 제자가, 따끔하게 꾸짖곤 했던 선배와 후배들이 제로회에 참여하면서 누군가의 말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다.
"방학 때마다 김천시내 골목에 내걸렸던 '제로회' 전시전 포스터를 보면서 미술학도의 꿈을 키웠고, 포스터 속의 선배들을 직접 만났을 때는 나도 그 꿈을 이뤘다는 것을 느꼈어요. 제로회는 김천 출신 미술학도들의 놀이터이자 고향이 됐습니다." '그때 그곳'을 떠올리는 화가 황혜진 씨의 얼굴은 소녀처럼 발그레해졌다.
이번 전시회에는 8명이 20점의 작품을 내놓았다. 습식수채화, 유화, 꽃누름(Press flower), 아르곤용접과 프라즈마절단, 조각, 프린트(Print)까지 다양한 작품들이다.
'혈망봉'과 '금강대'를 출품한 우정 씨는 "미술사조를 구현하거나, 같은 지향점을 가진 작가들이 작품을 내는 다른 기획전과는 달리 우리는 장르를 '따지지도 묻지도' 않는다"며 "한 고장 출신이라는 단 한 가지 주제 외에는 어떠한 제한이 없는 전시회가 우리 제로회의 모토라면 모토"라고 강조했다.
고향 출신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서인지 선후배들의 작품을 바라보는 눈빛은 그윽하기 그지 없었다. 사제지간이기도 하고, 가장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빚었던 시간을 함께한 선후배 사이이기에, 한마디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분위기가 전시공간을 가득 채웠다.
김천여고 출신인 갤러리 고도의 이율리아 씨는 "나무젓가락이 없을 때는 붓을 거꾸로 쥐고 라면을 먹었고, 담요가 없어 신문지로 몸을 녹이며 선을 그렸던 시절, 우리 모두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것외엔 다른 꿈을 꾸지 않은 미술학도들이었다"며 "고향을 떠나 제각각 상경했지만 그래도 우리를 이어주는 것은 고향"이라고 말했다.
제로회는 도약을 꿈꾸고 있다. 고향사랑 외에는 제약이 없는 모임인 탓에 세월이 흐르면서 회칙이 흐지부지됐고, 회원 수도 정확히 추산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누군가가 "한 고향 예술가들의 모임은 이곳밖에 없지만 강제성이 없어서 '전부 제로'"라고 하면서 "내년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2기 멤버인 조의환 씨는 "고향 후배들의 전시회와 OB(old boy)그룹전을 함께 열어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로 했다"고 소개했다.
오후 7시. 전시회의 첫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 인사동의 한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예외는 없어여. 모두 필참하세여." 시간이 무르익자 많은 출향인사들이 속속 자리를 함께했다. 붓을 잡았을 때가 참 행복했다던 아줌마와 이번에 작품을 못 내 미안하다는 후배 화가, 작품 감상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아저씨에 이르기까지 서른 명 가까운 김천 출신 미술학도들이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를 음악삼아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상현기자 subo80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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