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랑요? 우린 '칼싸움'하면서 확인해요!"
가족끼리 서로 칼을 겨누고 휘두르면서 사랑을 키워나가는 가족이 있다. 그렇다고 '막 나가는' 가족이 아니다. 일검관(대구 수성구 신매동)에서 검도를 배우는 '검객(劍客) 가족' 유미연(40)-권구(14'안심중 2년) 모자와 박충기(40)-주연(11'청림초교 5년) 부녀다. 이들은 아침저녁으로 '얼굴이라도 잠시 볼 수 있으면 다행'인 우리네 현실에서 이들은 '검'을 들고 정면돌파하고 있다. '검'을 잡고 땀을 흠뻑 흘리다 보면 가족의 정은 저절로 넘쳐난다.
◆모자 검객
중학생 아들이 죽도로 엄마의 머리와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죽도가 호구에 부딪치는 소리가 도장 안에 쩌렁쩌렁 울린다. 손목을 맞을 땐 아플 법도 하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땀 범벅이 된 엄마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살짝 비친다. 대련이 끝나자 엄마 유미연 씨는 아들 권구에게 "누나들하고 대련할 때 그렇게 세게 때리지 마라"며 도복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 유 씨의 손목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유 씨는 '남자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란 매력에 검도를 시작했다. 1995년 검도에 입문해 2년 정도 하며 초단까지 땄다. 그러나 자녀를 키우면서 죽도를 놓고 잡기를 반복했다. 1남 2녀를 둔 유 씨는 맏아들인 구가 7세 때 다시 검도장을 찾았다. 아들과 한번 칼을 겨눠보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이번에도 채 1년도 가지 못해 손을 놓았다. 검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유 씨는 지난해 초 아들 구부터 다시 죽도를 잡게 했다. 이후 유 씨도 올 3월 도장을 찾았다.
유 씨는 "아들은 어릴 땐 엄마 말을 잘 듣지만 점점 크면서 멀어지고, 사춘기가 되면 대화가 단절될 것 같아 걱정하다 함께 부딪치고 공통분모를 가지게 되면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들과 검도를 같이하게 됐다"고 했다.
모자가 함께 검도를 하다 보니 친해지는 것 말고도 좋은 점이 많다. 아들은 '엄마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운동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좋고 심리적으로 편안하다. 엄마는 같이 검도하는 수련생들로부터 '구는 대련할 때 너무 과격하다' '구가 어떻게 행동했다'는 등 시시콜콜한 일상사까지 들을 수 있어 아들의 평소 생활을 실시간 모니터링할 수 있다.
검도를 시작한 뒤 성격도 변했다. 구는 "성격이 급했는데 검도를 하면서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수 싸움을 위해 참고 기다리는 연습을 하다 보니 자제와 감정 조절 능력이 생기는 것 같다"며 "학업이나 일상생활에서의 자세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끼고 다른 것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고 했다.
이제 모자의 실력도 제법 비슷해졌다. 엄마는 초단, 아들은 1급. 고교생쯤 되면 아들과 한번 붙어보고 싶다고 희망했는데 벌써 힘에 부친다. 구는 "정식으로 대련을 해보지는 않아 잘 모르겠지만 엄마가 이길 것 같다"고 했고, 엄마는 "관장님이 '이젠 구가 엄마를 이기겠다'고 하시기에 '아들에게는 절대 얘기하지 마라'고 부탁했다. 아직 검에서만큼은 아들보다 더 큰 엄마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구는 지난달 29일 대회에 출전 '마수걸이'를 했다. 대구 서구청장기검도대회 단체전에 선봉장으로 출전해 준우승을 일궈냈다. 구는 "첫 시합이다 보니 처음엔 많이 떨렸는데 이기니까 자신이 생기고 재미도 있었다"며 "다음 달 17일 대구시장기검도대회에 단체전과 개인전에도 출전하는데 이번엔 꼭 우승하고 싶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가족 5명이 모두 같이 검도를 하고 싶지만 여의치 않다. 유 씨는 "남편과 첫째 딸은 아예 운동에 관심이 없어 포기했다. 초교 2학년인 막내는 올여름 방학 때부터 검도를 시킬 작정"이라며 "이번에는 중간에 쉬는 일 없이 아들과 함께 계속해 둘 다 4단까지 따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부녀 검객
박충기 씨는 암담했던 현실을 '검도'로 돌파했다. 병원에 근무하면서 2년 동안 공부에 매달렸지만 국가고시 자격증(방사선사) 시험에 두 번 연속 낙방하면서 모든 일에 자신감과 의욕을 잃었다. 가정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며 퇴근 후 새벽까지 공부하고 다시 출근하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는데 실패하고 나니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고 가족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자격증 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결심까지 했다.
그러던 중 박 씨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2009년 5월, 직장 동료의 권유로 우연히 검도를 접하게 된 것. 박 씨는 "새벽형 인간도 아니었고, 경산 진량에 살았기 때문에 새벽반 강습을 받으려면 새벽 5시 30분엔 버스를 타고 나와야 해 다니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며 "계속된 동료의 권유에 예의상 '한 번만 가보겠다'는 생각으로 마지못해 도장을 찾았는데 해보니 어렵지도 않고 재미도 있어 '일주일만 더 다녀보자'고 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검도를 하기 전까지 운동이라곤 배워본 적이 없는 박 씨였지만 검도의 매력에 푹 빠지면서 생활이 변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두 달쯤 지나니 마음이 안정되고, 넉 달쯤 되니 자신감도 붙었다. 시험을 치면 다시 떨어질까 두려웠는데 '떨어지면 어때, 또 치면 되지' 하는 자신감이 생겨 자격증 시험에 다시 도전, 그해 12월 결국 보란 듯이 합격했다. 박 씨는 "운동하면서 공부하는 데 대해 주변의 걱정이 많았지만 검도를 통해 공부에 자신감이 생기고 체력까지 좋아지는 등 오히려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에 박 씨는 지난해 5월 집을 아예 검도장 부근으로 옮겼고, 이사하자마자 딸 주연이까지 도장으로 데리고 갔다. 하나뿐인 딸에게도 자신이 경험한 '새로운 세상'을 소개시켜 주고 싶었던 것. 박 씨는 "직접 해 보니 어떤 운동보다 안전하고 집중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아직 어리고, 딸이지만 권하게 됐다"며 "나이 들어도 할 수 있는 운동인 만큼 딸과 함께 오랫동안 하고 싶다"고 했다.
역시 효과 만점이었다. 박 씨는 "주연이도 검도를 한 뒤 성격이 밝아지고 사교성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며 "부작용이 있다면 활달함이 넘쳐 말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주연이도 "호구 등 장비를 입고 하니 신기하고 재미있다"며 "매일 땀 흘리고 바로 씻고 해서 그런지 심했던 아토피도 몰라보게 많이 좋아졌다"고 자랑했다.
딸이랑 함께 운동하면서 받은 최고의 선물은 뭐니 뭐니 해도 '관계 회복'이다. 같이 운동하면서 하루하루 딸이 커가는 것을 직접 볼 수 있게 됐고, 무엇보다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아져 지금은 엄마보다 더 친한 '친구'가 된 것. 주연이는 "그전에는 아빠 얼굴 보기도 힘들었는데 검도를 함께 하고 나서부터는 최소 매일 저녁 2시간 정도는 같이 있게 돼 오히려 엄마보다 더 친해졌을 정도"라고 했다. 박 씨도 "어느 날 주연이가 고민을 털어놓기에 아내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물어봤더니 엄마한테는 얘기를 안 했더라"며 뿌듯해했다.
검도는 가족 운동으로 더할 나위 없는 스포츠라는 게 박 씨의 주장이다. 장비를 착용하기 때문에 다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안전한 운동인데다 상대와의 기싸움이나 교감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끼리 대련할 경우 말하지 않아도, 공격하는 것만 봐도 기분을 알 수 있다는 것.
박 씨는 주연이가 결혼하기 전까지 함께 검도를 계속하는 게 목표다. 박 씨는 "주연이가 나중에 커서 결혼할 때쯤 애인을 소개해주면 바로 도장으로 데려가 '부녀 간 대련'을 통해 '내 딸이 얼마나 강한지' 직접 보여줄 것"이라며 행복해했다.
이호준기자 hoper@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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