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파리의 지하보물

파리의 생활은 센강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파리에는 이 물과 연결되어 파리를 파리답게 만든 비밀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이른바 '하수도 박물관'이다. 그 입구는 인상파 그림으로 유명한 오르세 박물관부터 알마 다리가 있는 부근에서 시작된다.

강화도령으로 유명한 철종 임금이 왕위에 오를 시절인 1850년경에는 파리도 진흙탕에 발이 빠지는 도시였다. 모든 생활하수들이 상수원으로 보호되고 있는 센강에 그대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파리의 상하수도시설은 증가하는 인구에 비해 불충분했다.

이때 나폴레옹 3세가 혁명으로 세워진 프랑스 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파리 자체를 다시 짓고자 했다. 그 책임자인 오스만 남작은 벨그랑(Belgran)이란 토목 기술자를 파리 상하수도 책임자로 발탁했다.

벨그랑은 야심 찬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그는 1852년부터 17년에 걸쳐 약 2천100㎞에 달하는 4중 복개 하수도를 완성했다. 그는 도시에 신선한 물을 날마다 필요량의 두 배로 공급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그리고 네 집을 하나로 묶어, 지하 하수도 통로에도 지상과 똑같은 주소를 부여했다. 즉 파리라는 도시를 그대로 뒤집어서 지하에 넣은 것이다.

파리는 하수를 모아서 흘려보내는 일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물을 정화해서 다시 사용하도록 했다. 기본 하수도망은 지름이 1.2m 관으로 깔려 있고 각 건물의 생활하수는 지름이 2m 정도의 보조 하수도로 흘러 모인다. 센강 좌안과 우안에서 나온 하수도뿐만 아니라, 빗물도 모두 지름이 2.8m나 되는 대하수관으로 모여서 서북쪽 아쉐르 하수종말처리장으로 보내진다. 처리 공정을 완전히 통과한 물의 약 80%는 센강에 흘려보내고, 나머지 20%는 파리 시내를 청소하기 위해 각 시내 도로변으로 흘려보낸다.

또 오늘날 파리 하수도는 각종 발명으로 이어지는 가스관, 전선'전화망, 인터넷망들을 정리하고 있다. 즉, 파리의 하수도는 생활하수와 빗물의 저장 및 처리, 전선과 가스관의 설치가 이루어진 곳이다.

벨그랑의 이러한 사업은 역사 속 다른 토목공사들과는 달리 당시 대중의 압도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는 1867년부터 새 하수도 시스템을 관광으로 공개했고, 자신의 작업과정을 책으로 펴내 대중과 같이 호흡했다.

또한 당대 사진가 나다르는 이 하수도를 촬영하여 대중화를 뒷받침해 주었다. 당시는 사진술이 막 시작된 때였다. 벨그랑의 꿈은 당시로서는 허황하리만큼 거대했다. 그러나 그 거대함은 하수도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태가면서 현대인들에게 물을 이해하게 하는 박물관으로 제공되고 있다.

최근 쏟아지는 집중호우를 보면서 물폭탄이니 개발이 낳은 인재(人災)니 하는 소리들을 듣는다. 우리 생활에서 개발은 필요악일지 모른다. 그리고 친환경적인 개발은 대가를 미리 지불해서 앞으로의 재앙을 막아줄 수 있다.

모든 자연과 마찬가지로 물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오면서 환경과 어울려 만든 경험이기 때문이다. 서울 우면산에 있던 대성사 법당이 주변 건물은 다 떠내려갔는데도 기왓장 한 개까지 멀쩡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다른 건물과는 달리, 법당은 전통적으로 있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물이 얼마나 제 길을 찾는지를 알려준다. 물은 이처럼 자신의 길을 잊지 않는다. 그러기에 물은 지하 속으로라도 자신의 길이 트여 있어야 한다.

30분만 비가 내려도 발이 빠지는 도로 위에 서서, 몇 백 년 후에까지 탈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하수도를 설계했던 벨그랑의 배짱이 부러워진다. 파리의 하수도는 파리의 아름다움을 지켜주는 수호자가 되었다. 벨그랑이 탄생시킨 하수도는 프랑스의 숨겨진 저력과 탄탄한 기초를 오늘도 알려 주고 있다. 벨그랑과 같은 혜안(慧眼)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김정숙(영남대 국사학과 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