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앞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백하구려(白下舊廬'경북기념물 137호). 이 고택에는 백하 김대락과 함께 막내 여동생 김락, 조카 만식'정식'규식, 규식의 아들 성로 등 독립지사 여섯 명의 구국혼이 서려 있다. 그들의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 나라를 되찾기 위한 구국항쟁의 정신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1910년 12월 24일, 내앞마을의 노선비 백하 김대락(1845~1914)은 의성 김씨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 길에 오른다. 한일 강제병합으로 나라가 망한 지 넉 달, 그때 나이 65세.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독립투쟁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압록강 건너 서간도까지 가는 넉 달간의 험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국내를 통틀어 첫 번째 문중 단위 집단 망명이었다. 백하는 만주에서 매부인 이상룡(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과 함께 한인 자치조직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매진하다 1914년 삼원포에서 세상을 떠난다.
내앞마을은 백하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공자를 25명이나 배출한 마을이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김동삼(1878~1937), 백하의 아들로 해방 직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김형식(1877~1950)도 이 마을 출신이다.
마을에는 백하의 고택 '백하구려'와 김동삼의 생가가 있다. 백하구려에 살고 있는 후손 김시중(75) 씨는 방 안 벽에 선조들의 독립투쟁 훈장증과 이 집을 임시교사 겸 기숙사로 썼던 협동학교 관련 기사가 실린 일제강점기의 황성신문 복사본을 붙여놓고 있다.
백하구려는 육십 평생 유림으로 살아온 노선비가 세계관의 대전환을 일으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백하는 의병 투쟁이 곳곳에서 일제에 패하고 망국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1909년 초 혁신 유림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백하구려 사랑채를 협동학교 교실로 내놓았다. 백하의 변모는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드러난다. '늙은이 눈 어두워 죽은 듯이 누웠다가 창문에 기대어 대한서를 읽는다. 폐부를 찌르는 말 마디마디 간절하니 두 눈에 흐르는 눈물 옷깃을 적시네' 뼈저린 대오각성이었다.
안동'엄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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