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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흥렬의 에세이 산책] 돌이키지 못할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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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봄날의 오후는 지루하리만치 길다. 겨울철이었으면 하마 어둠살이 몰려왔을 시간인데도 아직 해가 중천에 걸려 있다. 이 훤한 대낮에 강아지만 한 짐승 하나가 반쯤 차로를 물고 뽈뽈뽈 기어가고 있었다. 새끼 너구리 같았다. 조건반사적으로 액셀러레이터에 발이 갔다. 그러면서 반대편 차로로 살짝 핸들을 꺾었다. "무사히 지나쳤겠지" 옆 좌석의 아내에게 물으며 진행차로로 돌아왔다. 한데 느낌이 이상했다. 미심쩍은 마음에 백미러로 뒤를 살펴보았다. 거무끄름한 물체에 움직임이 없다. 직감적으로, 치였구나 싶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아내의 말로는, 길 밖으로 나가던 녀석이 방향을 바꾸어 안쪽으로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차를 세우고 허겁지겁 다가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주둥이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에 가슴이 쓰려왔다. 내 철들고 나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육고기를 멀리했고, 그러다 십여 년 전부턴 아예 금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살아왔음에도 이런 악연을 만들다니. 살려낼 재간이 없다.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근처 인가에 들러 삽을 빌려서는 나무 밑에다 고이 묻어 주었다. 수목장(樹木葬)을 치르는 심정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부터 열었다. 인터넷에서 자동차법규를 검색해 보았다. 거기에는 갑자기 짐승이 나타났을 때의 대처요령을 묻는 문항이 있었다.'갑자기 짐승을 발견했을 때는 피해서 핸들을 꺾어야 한다.' 이 항목이 틀린 답이었다. 불가항력적일 때는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치고 지나가라는 것이다. 어설프게 핸들을 꺾으려 하다가는 자칫 사고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설이 붙어 있었다. 자동차법규에는 비록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만 나는 무의식중에 핸들을 꺾었다. 게다가 불가항력적인 상황도 아니지 않았는가. 그랬는데도 결과적으로 살생을 하고 만 셈이다.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명복이라도 빌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는 죄책감에서 놓여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슈퍼마켓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막걸리 한 병을 샀다. 그러곤 현장으로 차를 몰았다. 녀석을 묻은 나무 밑에다 막걸리를 붓고는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기를 빌어주었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법대로 따지면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하지만 법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은가. 이제껏 운전을 하며 비 오는 날 도로를 폴짝거리는 개구리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애써온 내가 본의 아니게 살생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이 죄를 어쩔 것인가. 이번 일을 경계삼아 앞으로 운전에 더욱 근신하라는 절대자의 말없는 계시이리라. 차의 속도가 전에 없이 느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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