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육중한 호랑이 석상 하나가 우리 집 거실 한 귀퉁이를 떡하니 자리 잡았습니다. 호랑이상이라 하기엔 덩치에 비해 위엄이 별로 없습니다. 입을 쫙 벌려 이를 다 드러내고는 낄낄 웃어 제치는 그 표정이 익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앞다리에 힘을 꼿꼿이 모으고 꼬리는 등 뒤로 느긋하게 걷어 올려 강건하고 다부진 자태이지만 정 날이 거칠게 지나간 자국에서 오히려 여유롭고 넉넉함이 풍겨납니다. 추녀와 지붕마루 혹은 사래 끝 귀면(鬼面)기와에서 본 너털웃음의 해학에 따뜻한 훈기가 전해 옵니다.
나는 돌로 다듬은 일용도구에 유난히 애정을 가집니다. 현대 생활에서는 별 쓸모없는 것들이지요. 할머니의 손때와 삶의 애환이 묻어있는 풀맷돌이며 이끼 묻은 청석 돌확, 천년의 물살에 패이고 닳은 넓적한 빨랫돌…. 그런 것들을 마주 보고 있으면 맘이 참 푸근해지고 그냥 기분이 좋아지니 그야말로 내 취향일 뿐입니다.
30여 년 전, 타이페이로 유학길에 오르기 전 고향의 선릉을 찾았을 때입니다.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날로 부터 새로이 펼쳐질 미래까지 내 인생의 로드맵을 그리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있다가 문득 '내 나이 환갑이면 어떤 자화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옳다, 하나의 단단한 돌 표면 위에 내 삶의 심기를 담아내는 정 질을 해보자. 내 자화상이 되리니'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혹은 무엇을 이루었거나 잃었을 때, 그때마다 나의 감정을 정 끝이 가는대로 다듬어내 보자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나는 마침내 고향 후배의 도움으로 제법 무거운 암석 하나를 산곡에서 집으로 옮기는 대역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태, 그 잘 생긴 화강석의 단단한 돌에 단 한 번의 정 날도 들이대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고향집 섬돌로 쓰이고 있는 그 돌을 볼 때 마다 나는 그날의 은밀했던 계획이 떠올라 피식 웃음을 흘리곤 합니다. 그때의 생각처럼, 정말 내가 그 돌 위에 한 자국 한 자국 정 날을 쪼아댔더라면 이순(耳順)을 넘긴 나의 모습이 어떻게 음양각되었을지 참 궁금해집니다. '평생을 바쳐 장교들을 양성해 냈으니 좀 근엄한 모습일까, 아님 강의와 집필에 몰두한 긴 세월이었으니 냉정하고 지적인 모습일까, 그도 아니면 북북 화를 내다 제 풀에 쉬 풀어지곤 하는 다혈질 남성일까….'
나는 근엄하기 보다는 오히려 친화적이고 싶습니다. 세련되고 매끈하기 보다는 좀 헐렁하고 부족해지고 싶습니다. 점잖고 무겁기보다 일상을 유쾌하게 맞이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잘 웃는 정겨운 입술과 잘 들어주는 참한 귀를 가지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가 희망하는 자화상은 언제나 저만큼 먼 거리에 선 채 좀체 내 가까이로 다가서지 않습니다.
어느 봄날 신록을 맞이하러 대구 근교로 나섰습니다. 수려한 경관에 발을 멈추었던 곳에서 아늑한 갤러리를 만났지요. 그곳에서 거래할 의사가 거의 없이 장식품 정도로 전시된 그 자유로운 웃음의 호랑이 석상이 내 맘을 송두리째 잡아당긴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내 얼굴을 보았습니다. 아니 내가 희원하고 닮아가고 싶은 나의 자화상을 만난 것입니다. 나는 그만 그 호랑이상에 아름답게 구속되고 맙니다.
웃는다는 것은 진실로 평화입니다. 활짝 웃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웃음은 잎이 아니라 꽃입니다. 꽃을 기하학으로 표현하면 아마도 하나의 원형으로 대신할 수 있겠지요. 꽃의 외양은 마치 웃는 얼굴 같아 보이니까요. 그러기에 웃는 자신의 얼굴은 곧 한 송이 꽃이 아닐까요.
웃어라 웃어라 하지만 어디 웃음이 그리 쉬워야지요. 먼저 마음이 열려야 하고 또한 저절로 웃을 수 있도록 나의 일상이 연습되어 있어야 하니까요. 진정 웃을 수만 있다면 별 비용도 없이 큰 것을 얻어 내는 거지요. 좀 못 났으되 웃는 내 얼굴을 누가 밉다 할까요. 웃어서 내가 젊어지는 데 감히 누가 나를 타박할 수 있을까요. 웃음으로 마주한 이를 데워주는 데 누가 나를 냉정하다 할까요.
오늘도 집에 들어서면서 나는 호랑이 조각상과 눈 맞춤을 즐깁니다. 내 안에서 화들짝 웃음싹이 쑤욱 자랄 것만 같습니다. 이제부터 기분 좋은 나의 자화상을 꿈꾸어도 될 듯합니다.
김정식/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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