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침탈한 일제에 맞서 고향 호남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오성술(吳成述'1884~1910)은 나라 위한 일이 죄가 돼 27세에 타향 대구에서 삶을 마쳤다. 그는 1905년 7월 21세에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나라 삼킬 야욕을 노골화하자 의병이 됐다.
'내 평생 시름 없는 사람이라 자위했건만/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져 그 걱정 뿐이네'''/ 붓을 내던지니 오직 백성 시중들 생각만 하네 / 세상살이에 마음 속 일을 알기 어렵지만/ 분노 그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그의 시처럼 나라 걱정에 분노했고 그냥 있을 수 없었다. 1908년 의병장으로 전남 담양서 일본군 지휘관을 사살했고, 군자금 마련을 위해 광주의 일본인 집을 습격해 3명을 죽였다. 나주에선 조선인 밀정을 없앴다. 1907년 이래 3년 동안 광주'나주'담양'함평'고창 일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1909년 8월 일본군 헌병 '폭도토벌대'에 결사 항전하다 잡혔다.
사법권을 뺏은 일제는 그해 11월 강도죄로 징역 15년을 언도했다가 다시 살인 등을 추가, 1910년 6월 교수형을 내렸다. 가족의 항소를 대구공소원은 그해 오늘 기각했다. 전남 광주서 태어난 그는 그해 9월 15일 대구감옥에서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인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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