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북한 농업 개혁

마르크스는 역사 발전의 완성 단계인 공산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이상향은 지금까지 실현된 적이 없다. 그의 이념을 실천하려 했던 현실 사회주의는 모두 처절하게 실패했다. 왜 그런가. 인간 심리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이기심의 위력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내 것'에는 애착을 갖지만 '모두의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공동 목초지가 황폐화될 수밖에 없는 '공유지의 비극'이 생겨나는 이유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집단농장 실험이 절절히 입증하고 있다. 스탈린이 농업을 집단화하자 농민들은 곡물을 갖다 바치느니 태워버렸고 농기구를 부숴버렸다. 기르던 가축도 모두 잡아먹었다. 그렇게 해서 사라진 가축은 말 1천800만 마리, 암소 3천만 마리(전체의 45%), 양과 염소 1억 마리(전체의 3분의 2)에 달했다. 이 같은 저항을 분쇄하고 농업집단화를 이뤄냈지만 이번에는 심각한 생산성 저하가 발목을 잡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소련 당국은 1935년부터 가구당 0.25~0.5㏊의 '개인 텃밭'을 허용했다. 그러자 기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전체 경지 면적의 3%에 불과한 개인 텃밭이 전체 농업 생산의 20%를 산출한 것이다.

이러한 '내 것'의 위력은 중국에서도 입증됐다.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으로 황폐화된 농업을 되살리기 위해 고심하던 덩샤오핑은 이미 일부 지역에서 음성적으로 추진돼 상당한 성과를 거둔 영농 방식을 1981년에 공식 채택했다. '가정연산승포책임제'(家庭聯産承包責任制)라는 것으로, 정부가 정한 최소 생산물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농민이 처분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1979년에서 1984년 사이 농업 생산이 무려 55%나 성장한 것이다. 중국이 미국과 겨룰 수 있는 내적 기반은 여기서 닦였다.

북한이 식량난 해결을 위해 농업 개혁에 착수했다고 한다. 협동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기본단위인 분조(分組)를 기존의 10~25명에서 4~6명으로 줄여 '가족농'처럼 운영하고 이들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농산물의 비율도 늘린다는 것이다. 북한은 1997년에도 이와 비슷한 조치를 취한 바 있다. 그러나 '인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주민에 대한 통제력 상실을 우려해 제대로 시행하지 않은 탓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 제발 그렇게 되기를 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