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삭쿠이소…"

얼마 전, '공공 디자인'으로 마을을 꾸미는 데 성공한 어느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런 사업은 마을의 외관만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살기 좋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속의 삶을 뒷받침해주는 무형의 틀을 구축하려고도 한다. 공동체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이 '무형의 틀'에 비슷한 종류처럼 보이는 다음의 말들이 따라다닌다. 예술정신, 인문정신, 공공성, 공공장소, 문화, 문화공동체, 문화콘텐츠, 감성학 등등. 마을 단위가 아니라면 예술을 매개로 하는 소규모 공동체 활동들도 비슷한 방향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것 같고, 혹은 창조성이나 혁신 등을 경제활동의 동력으로 삼는 경제 공동체를 도모하기도 한다.

어쨌든 예의 공공디자인 사업을 시작하던 즈음, 마을을 관할하던 관공서는 말할 것도 없이 마을 주민들은 사업 측 사람들에게 매우 노골적으로 의혹의 눈길로 냉대하고 비웃음과 분노를 드러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자신의 터전에 기획단이 섞이지 못하도록 온갖 구박을 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결과는 이 마을이 민'관'예(民官藝)가 함께 짜낸 멋진 태피스트리가 되어 성공적인 미적 공동체라는 것이었다.

미술감독이 마을을 대상지로 선택한 결정적 요인은 재개발 계획에 마을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내막이야 어찌 되었든 생활의 현장을 바꾸고 수선하기 위해 다양한 사람으로부터 합의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며 실질적인 고충이 동반되는 노고이자 노역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미적인 기술이나 이념은 필시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과 관련되는 것이리라. 그러니 공공 '디자인'이나 공공 '미술' 모두 외양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좋은 마을을 유지하는 데 관련되는 핵심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공공성'이라는 것이 어디 쉬운가. 마을을 방문한 날, 이 모든 어려움을 함축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성인 한 사람이 겨우 지나칠 만한 골목을 내려가는데 마을 주민 한 분이 우리를 향해 올라오고 계셨다. 우리 무리가 눈에 띄자마자 붉으락푸르락 격분하기 시작한 이분은 급기야 감독을 향해 막말과 상소리를 퍼부었다. 필설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졌고 일행 모두 그 자리에서 '벅수'가 되었다.

그런데 화난 주민의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무나 불쑥 찾아 와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구경하고 그 와중에 드러나는 누추한 일상의 찌꺼기가 누군들 좋을까. 내 삶의 파편이 의도치 않게 전시되는 것이 좋을 리 없다. 이 점은 비단 이 분만의 불만도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원죄를 기획자에게 돌릴 수밖에.

그런데 내게 각인된 장면은 그 다음이다. 묵묵히 듣던 감독의 한마디가 이어졌다. "삭쿠이소…." 이 말은 화난 주민에게 손님들이 계시니 참으라는 일방적인 자제를 요구하거나 강제하는 말이 절대 아니었다. 그의 말은 공감과 난감을 동시에 드러내는, 달리 적합한 말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의 간투사이자 위로의 말과 같았다. 이 속에서 진하게 풍겨오는 진정성은 주민과 감독 사이의 내력을 우리 같은 외지인에게 곧바로 요약해 주는 것이었다.

이뿐 아니다. '이웃과 함께한다는 것'은 언제나 반쯤 실패하는 소통이라는 점, 그리고 이 점을 이미 알고 있다는 안도감을 웅변해 주는 듯했다. 소통의 일방통행이나 소음과 잡음이 없는 공동체란 얼마나 손쉬운 구상이자 허구적인 공동체일까. 이는 면역 제로의 공동체가 될 것이고, 곧 소멸하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미술이나 디자인 혹은 예술이라는 명칭으로 '공공적인 것'에 관여한다는 것은 지속가능하면서도 실패와 소음이 이어지는 활기찬 공동체를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공공적인 것은 지속가능한 측면에, 각 개인의 개성과 고유성은 실패와 소음이 일어나는 자리에 배당해볼 수 있다. 그런데 미술, 디자인, 예술 등의 이름이 관련되면 그렇게 되는가? 예술은 세계, 이웃 등 우리 외부의 타자를 향해 길을 내는 것이 그 본령이기 때문에 성공할 확률이 높을 뿐이다. "삭쿠이소…." 이 말의 진동이 절대로 만만치 않은 일임을 묵직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남 인 숙(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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