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은밀한 자두-이화은

입구를 감추어 둔 무릉도원처럼

동네에서 단 하나뿐인

자두 밭은, 물을 열어야 들어갈 수 있었네

개 짖는 소리는 온통

날카로운 이빨 자국 투성이어서

사내아이들은 산란기의 개구리들처럼 밤마다

첨벙첨벙 물속으로 뛰어 들었네

어둠이 수초처럼 뒤엉킨 연못을 건너오는 동안

자두는 저 혼자 탱탱 배가 불렀고

여자가 되는 줄도 모르고 여자아이들은

사내아이들이 훔쳐오는 붉은 열매를 깨물었네

시고 떫은 시간의 어디쯤 앉아

달고 무른 과육을 빨아 먹으며

덜 자란 사내들의 사내아이를 하나씩

낳아주고도 싶었네

자두를 훔치기 위해 알몸으로 목숨을 건너는

어떤 종족의 생몰기도 이제 없고

늙은 자두 밭은 세월에 터를 팔았다 하네

예전보다 신색이 못하다는 연못은

그래도 자주, 가끔, 안부를 전해오는데

풍문의 귀를 접은 매듭 편지 한 장

전하지 못하였지만

무릉도원이 없는 자두는

은밀한 자두 맛이 나지 않고 한 생이

한 저녁만큼 더디 간다는 생각을 오래 하네

----------------

유년시절은 시의 고향입니다. 그러나 옛날 일을 그대로 옮겨 놓는다고 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대한 시인의 해석이 어떤 의미를 지닐 때 비로소 시가 됩니다. 자두를 훔치기 위해 알몸으로 연못을 몰래 건너는 유년의 풍경은 그 자체로 시적이긴 합니다.

하지만 알몸으로 헤엄쳐야 도달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자두 밭에, 순수한 마음을 모두 바쳐야만 닿을 수 있는 이상향이라는 의미가 부여될 때 그 경험은 더욱 의미가 깊어집니다. 그때 아이들의 이야기는 "어떤 종족의 생몰기"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시인·경북대 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