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의사는 중인(中人)이었다. 이 때문에 국가가 의학을 장려하고 때로 뛰어난 의관들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기도 했지만 양반집 자제들은 의사 직업을 택하지 않았다.
중인 신분에는 의관 외에 통역관(외교관), 음양관(과학자), 율관(법조인), 산원(회계사), 화원(화가), 악원(음악인) 등도 포함됐다. 오늘날 선망하는 전문직은 당시 중인계급에 머물렀다.
◆생명을 다루지만 잡학 중 일부
유학(儒學)이 모든 학문의 으뜸이었던 시절 전문기술이나 기능은 양반이 배울 것이 못 됐다. 의학은 생명을 다루는 분야였지만 어디까지나 잡학(雜學)의 일부일 뿐이었다.
물론 의학은 잡학 중에서 최상급이었다. 과거시험 분야도 의과와 함께 역과, 음양과, 율과뿐이었다. 나머지는 실기시험인 취재(取才)만 있었다.
의사가 되려면 취재와 자격시험인 의과를 모두 통과해야 했다. 취재에만 합격해도 임시직 의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가공인 의사가 되려면 의과에 합격해야 했다.
한양에선 전의감'혜민서가, 지방에선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 등에 있는 지방관청마다 의학생도(의생)를 양성해 의학 교육을 했다. 지방관청별로 8~14명씩 조선 팔도 전체에 최대 3천148명에 이르는 의생을 둔다고 경국대전은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지방 의료의 최일선에 있었다. 하지만 학자들은 실제 의생의 숫자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고 본다.
의학서를 익히고 의술을 배운 의생들은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하지만 아무나 의생이 되고 의과에 응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의술을 다룬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의료직은 대체로 대물림됐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대개 의원의 자제는 의생이 돼서 도제식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의술을 배워 의과에 응시했다. 이 때문에 "의원이 3대가 되지 않으면 그 약을 먹지 말라"는 문구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을 정도다. 아울러 서로 간 결혼을 통해 결속력을 높였다.
◆승진 시에도 신분적 한계에 부딪혀
의과 시험은 태조 6년인 1397년 처음 시행돼 고종 31년인 1894년 갑오경장으로 폐지될 때까지 약 500년간 지속됐다. 평균 2.2년에 1차례꼴로 모두 233차례 치러졌다.
3년에 한 번씩 시행되는 식년시(정기시험)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특별히 열리는 증광시(특별시험)가 있었다. 이들 의과 시험도 1, 2차로 나뉘었다. 1차 시험인 초시에서 18명, 최종 시험인 복시에서 9명을 뽑았다.
하지만 정원대로 뽑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원에 맞추지 않고 의술이 뛰어나야 뽑았기 때문이다.
시험과목은 꽤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가 되려면 좋은 머리를 타고나야 했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야 했다. 혈을 찾고 맥을 짚고 침과 뜸을 놓는 방법을 다루는 '찬도맥' '동인경' '화제지남'은 머릿속에 완전히 집어넣어 언제든 내용을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했다.
질병에 쓰이는 다양한 약제와 처방전을 다룬 '직지방' '득효방' '구급방' 등 8권의 의서와 법전인 경국대전(훗날 대전회통)은 어느 곳을 펼쳐도 곧바로 그 내용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알고 있어야 했다.
의과에 합격하면 예조의 도장이 찍힌 하얀 패를 주고, 1등은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의 직급을 수여했다. 이미 품계를 가진 사람에게는 한 품계 올려주었다.
하지만 의관들에게 계속적인 승진이 보장되지는 않았다. 법규상 최고인 정3품 당하관까지는 올라갈 수 있었지만 이른바 고위직에 해당하는 당상관에는 오를 수가 없었다.
물론 특별 승진의 기회는 있었다. 임금이나 왕실의 최측근에서 건강을 보살폈기 때문이다. 병을 낫게 하거나 왕비의 순산을 도우면 특진도 가능했다.
제9대 왕인 성종은 1494년 원손(元孫)이 태어난 것을 기뻐하며 의관 2명을 종2품에 제수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단지 출산을 도운 공로로 갑자기 높은 품계에 올랐으니 물정에 맞지 않는다"며 반발하고 승진 인사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성종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은 어의로서 1606년(선조 39년)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에 오를 뻔했다. 대신들은 예로부터 임금의 병을 고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지나친 대우라며 항의해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임금 치료 거부하다 목숨 잃기도
의관들이 높은 품계를 받는 데 따른 논란은 자주 벌어졌다. 당시 대신들은 적나라한 표현까지 쓰며 신분의 엄격함을 주장했다. '2품은 재상의 직급인데 의공(醫工)의 미천한 자에게 제수하고 있는데, 함부로 의원과 같은 용렬하고 천한 무리에게 제수해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성종 13년(1482년) 4월 15일 사헌부 대사헌 채수(蔡壽)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일부 내용을 풀어보면 이렇다. "비록 화타처럼 의술이 뛰어난 무리라도 앞서 역사에서 곁가지로 적어두고 열전(列傳)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출신이 보잘것없고 하는 일이 천(賤)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조선도 의관과 역관 중에 조금 우수한 자를 간혹 올려서 당상관을 삼고 2품으로 승진시키기도 했지만 특별한 혜택일 뿐 앞서 왕들이 행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들은 거의 모두 미천합니다. 외람되게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지나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분수가 아닌 것을 희망해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하니 마땅히 죄를 추궁하며 엄히 벌해서 그 나머지 무리들(다른 의관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게다가 의술이 잘못됐을 경우 무서운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왕을 치료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1420년(세종 2년) 10월 28일 조선왕조실록에 이런 내용이 있다.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된 태종은 왕실의 의료를 맡고 있는 전의감 책임자 정종하를 의금부로 보내 참형에 처하도록 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의술에 능했던 정종하는 정3품인 전의감 책임자였다. 의원 원학과 함께 돌아가며 숙직으로 상왕을 돌보라는 어명을 받았다. 원학이 정종하를 부르러 갔지만 그는 '상왕이 워낙 강직하고 총명한 탓에 두려워서 가까이 모시고 싶지 않다. 자신할 만한 경험이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나가지 않았다. 원학은 다시 사람을 보내 불렀지만 다시 꺼리며 나가지 않았다.
임금은 정종하를 의금부에 내려 보내 신문했다. 정종하는 "상왕께서 명철하시온데 만약 방서(의약서)를 물으시면 어찌 대답하오리까. 그래서 가지 못했나이다"라고 답했다. 결국 정종하는 대역죄로 참수되고 재산도 몰수됐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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