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미한 수술로 외출도 못하고 집에 있는데, 친구가 호박죽을 사들고 왔다. 소화기관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수술까지 치렀으니 별식으로 사온 것이라 한다.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나도 모르게, "나박김치는?"하고 물었다. 동네 시장에서 산 거라 나박김치는 없다고 한다. 대형 업체를 통해 유통되는 죽에 비해, 시장에서 제때에 만들어 파는 죽은 그 본질에 충실한 음식일 때가 많다. 특히 재료에 있어 자급자족이 대부분이라 믿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단지 나박김치나 쇠고기 장조림 같은 동반용 반찬이 소홀한 것이 흠이었다.
친구가 가고 나서 죽을 데운 후 냉장고를 열어 마땅한 반찬을 찾아봤다. 수술 끝이라 냉장고 안이 영 부실하다. 배추김치는 양념이 설쳐대서 안 되고, 생선은 비린내가 나서 곤란하다. 시금칫국은 죽과 궁합이 맞지 않고, 된장은 더더구나 죽의 맛을 해치기 십상이다. 궁리 끝에 가까스로 무말랭이 무침과 고추장 볶음을 조금씩 덜어 놓았다.
죽은 맛이 있었다. 늙은 호박맛이 깊고 톡톡한데다 간도 잘 맞았다. 가스불에 성의없이 후루룩 끓인 죽이 아니라 뭉근한 화덕불로 속 깊게 끓였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먹는 내내 머릿속에는 시원한 나박김치가 떠나지를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할머니의 나박김치가 그리웠다.
우수 경칩이 지나면 할머니는 남새밭 귀퉁이에 깊이 묻어둔 무를 꺼냈다. 할머니는 사람 입에 들어가는 모든 식재에 경외감을 갖고 있었다. 겨울철이면 땅 속 깊이 옹기를 묻고 배추, 무, 파 등을 그 속에 넣어 보관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무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몸통째로 겨우내 삭혀 시원한 동치미로 우려내는가 하면, 실처럼 가늘게 썰어 맵싸하게 조물조물 무쳤다. 참기름으로 다글다글 삼삼하게 볶는가 하면, 골무처럼 담박담박 썰어 말간 탕국을 끓여내기도 했다.
초봄에는 주로 나박김치를 담갔다. 해묵은 김장김치를 밀어내고, 향긋하고 개운한 나박김치를 상에 올리는 것이었다. 희디흰 무살을 나밧나밧 저며내어, 물기 자작하게 부어 삭혀내는 솜씨란!
멋내기인지 맛내기인지 샘가에 돋은 미나리 몇 가닥도 살짝 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람타는 남정네를 눈감아주는 여인네처럼 봄철 음식으로는 얇은 무 속살이 제격이지 않았을까?
죽 한 그릇을 다 비우고도 차마 숟가락을 놓지 못했다. 무말랭이도 고추장 볶음도 손이 가지 않았다. 돌미나리 살짝 뿌린 할머니의 나박김치만 입 안에 맴돌았다. 오늘따라 나박김치 타령은 왜? 아마 할머니가 그리운가 보다. 봄은 때로 사람을 외롭게 하여, 떠난 사람까지도 생각나게 하는 모양이다. 고약한 봄이다.
小珍/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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